- ▶ 위서를 가지고 민족의 얼·혼이라 가르치며, 교육계에 침투
▲ 천안 국학원 내부에 장식된 이승헌 사진 |
천안 단월드 국학원이나 충북 영동의 선교 국조전을 방문하면 건물, 인테리어가 비슷하다. 모두 단군 동상이 있고, 본관 건물 1층에는 수많은 기(氣)상품들을 진열해 놓은 판매처가 있다. 로비에는 임승국이 일본에서 국내에 역수입해 펴낸 한글 번역본인 『한단고기』와 대종교의 경전인 「천부경」으로 장식해 두었다. 특히 천안 국학원에는 47명의 단군에 대한 기록을 순서대로 배치해 두고 방문객들이 오면 안내위원이 안내하며 설명해준다.
단군상이 있고, 신화에 나오는 마고상이 있으며 태백교 경전인 환단고기, 대종교 교주인 나철 동상이 있다. 신화와 위서, 그리고 타종교까지 이용하고는 민족의 얼과 혼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이를 기반으로 각 급 학교와 단체, 군, 관,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민족혼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사이비 역사관을 가지고 교육계에 침투한 것이다.
▲ 천안 국학원 내부에 장식된 47명의 단군들 |
이곳들에서 전하는 『환단고기』를 필두로 하여 우리나라는 이른바 ‘상고시대’에 위대한 한민족이 아시아를 지배했다는 사이비역사가 널리 퍼져 있다. 원본이 없는 터라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고조선을 한 사람이 아닌 47명의 단군이 통치했다 하고,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니라 1만년이라 주장한다.
이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사람은 이유립(李裕岦, 1907~1986)이다. 계연수라고 하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그에게 받은 것이라며 삼성기(상), 삼성기(하), 북부여기, 태백일사, 단군세기 등 총 5권의 책들을 하나로 묶어 출판한 것이다.
이유립은 1932년 창립된 친일단체로 알려진 조선유교회의 명교학원 1회 학생이었다. 조선유교회는 공자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활동을 가르쳤고, 이유립은 1933년에 우등생으로 학원을 마쳤다. 이후 조선유교회 기관지 『일월시보』의 제2대 주필로 취임했다.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시를 투고하기도 했다.
1961년에 그는 대종교(교주 나철, 1909년 단군교로 창시, 1910년 대종교로 교명 변경)에 들어가 대전 시교당 전무로 있다가 1963년에 대종교인들을 데리고 단단학회(檀檀學會)를 조직했으며, ‘태백교’라는 신흥종교를 창설해 교주가 된다. 1960년대에 이유립은 『태백유사』나 『환단휘기』, 『삼신기』, 『진역고기』, 『진단유기』 등의 책을 만들고 있었다. 이중 『환단휘기』는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태백진훈』의 이른바 ‘홍익사서’라는 경전들로 만들어졌고, 기존에 『환단휘기』 안에 수록된 『태백유사』는 ‘태백일사’로 이름이 바뀌어 『환단고기』 안에 들어갔다. 이유립은 또 단군교의 『성경팔리』를 표절하여 『참전계경』을 만들어냈다.(이문영, 유사역사학 비판, p.206~207)
그리고 1965년 단단학회 기관지 『커발한』을 발행했다. 『커발한』은 ‘커다랗고 밝고 환하다’는 것을 축약한 말로 개천각을 묘사한다.
(*현재도 강화군 마니산(摩尼山) 참성단 아래 단단학회 본부인 단군성전(檀君聖殿) 대시전(大始殿)이 있고, 커발한 개천각(開天閣) 명패가 걸려 있다. 이유립 부부는 이곳에 살다가 이씨는 1986년 사망했고, 그의 부인은 100세 되던 해인 2021년에 사망했다. 이후 단단학회 태백교 건물은 단군교 계통의 무속인 단체인 ‘경천신명회’(敬天神明會)로 넘어갔다. 이 단체는 현 정권 지지선언을 한 바 있고, 민족종교협의회 회원이다. 지난 3·1절 103주년 기념 민족공동행사 3·1 희생 영령 국민추모제 및 기념식에서 이 단체 회장이 축사를 하였다.)
▲ 이유립, ‘커발한’ 창간호 1면 |
이유립이 쓴 『커발한』에는 『환단고기』의 제작과정이 드러난다. 1호 발기문에서, “우리는 신시개천의 신화를 가진 겨레입니다. 태초에 상제한인(上帝桓仁) 님께서 어느 날 인간 세상을 나려다 보시고...” 단군의 건국이야기를 신화로 본 것을 알 수 있다. 『커발한 문화사상사 1-2권』에서는 환웅천왕께서 태백산에 천강(天降)하셨고, 천부경을 가져오셨다고 했다. 그러니까 신화다.
(*단학회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단단학회(檀檀學會)나 태백교, 커발한 등은 일종의 소수종교로 분류되고 있다. 이유립이 만든 커발한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한글박물관은 이 잡지에 대하여 기관지, 종교잡지, 신종교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던 이유립은 박창암, 임승국 등 사이비역사학자들과 함께 1968년대 창간된 잡지 『자유』를 중심으로 1970~1980년대에 위서를 기반으로 한 상고사를 대중에 보급하는 데 힘썼다. 김대현은 ‘사이비역사학자들의 이상한 민족주의’-상고사(上古史)에 숨은 군부독재의 유산-이란 논문에서, “그들은 반공·냉전질서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하였고, 혈연적 민족주의를 종교적 숭배로 끌어올린 형태의 민족정교(民族正敎)를 부르짖었으며, 군부독재에서 군의 입지와 영향력을 옹호하였다... 이러한 사이비역사학자들의 민족주의는, 군부독재 세력이 위로부터 제작하여 주입하고자 한 교도민족주의의 성격을 띠었다.”고 하였다.
1968년 6월 창간된 『자유』 ‘창간사’를 보면, “자유지는 하늘의 공의를 지켜 국제공산주의자들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민족의 자유를 탈환하는 십자군의 선두에 나서서 감히 거창한 세기의 싸움에 자기를 바칠 것을 맹세한다”고 하였다. 즉, 냉전질서 속에서 북한 등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반공’의 ‘정신’ 무장을 앞세우기 위해 창간된 잡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집 방향은 당시 박정희 정권기 한국사회에서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이 잡지와 관련된 사이비역사학자들 가운데, 출판사 ‘자유사’의 핵심 인물인 박창암은 일찍이 만주군 간도특설대 하사관에 복무하였던 자로 광복 후,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6·25전쟁 중에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과 대북 심리전 분야에 주로 참여했다. 한국전쟁 당시 8사단 수색대장과 동해유격대장, 육군 특수부대장을 지냈으며, 60년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그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쿠데타에 혁명동지로 참여하면서다. 그는 5·16에 주체세력으로 참여해 ‘혁명검찰부’의 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이후 1968년 반공잡지 『자유』를 창간한 후 군인시절 얻은 군사 지식과 정세 정보를 통해 반공과 전쟁태세에 대한 글을 기고하였다. 그는 혁명검찰부장 시절에 장도빈을 만나 민족주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역사관 위에 반공이 덧붙여지면서 극우 국수주의 역사관을 지니게 되었다. 군납 잡지였기 때문에 군에 극우 사관을 주입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던 1975년 10월, ‘국사찾기협의회’가 발족되었는데, 당시 『자유』지에 이 협의회의 설립취지문이 실렸다. 내용을 보면,
1. 본 협의회는 단군조선은 실재의 상고시대로서 우리 국사의 상한으로 본다.
2. 본 협의회는 단군조선 이래 반만년의 역사강역은 현재의 한반도에 국축(跼縮)된 판도가 아니라 그 강역의 동은 연해주 일원, 북은 흑룡강 유역, 서북은 바이칼호, 남은 산동반도 일원 및 황하, 회수(淮水), 양자강에 걸친 중원대륙 등을 동서남북으로 경위삼아 일련하는 대강역이었음을 밝힌다.
3. 본 협의회는 현행 국정 국사교과서는 마땅히 그 반도 국축 사관을 탈피한 대륙사관에 입각하여 개정되도록 그 방향 촉구에 힘쓴다. 특히 단군신화설과 한반도 내 한사군설의 개정은 시급을 요하며...
이 협의회는 설립 취지문에서, “단군조선은 실재의 상고시대”이고, “단군조선 이래”의 “역사강역”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연해주, 흑룡강, 바이칼호, 중원대륙을 아울렀으며, “국정 국사교과서”는 “반도”에 “국축”된 사관을 개정하고 “대륙사관”에 맞게 집필해야 하며, 특히 “단군신화설”과 “한반도 내 한사군설”을 개정해야 한다고 명기하였다. 사이비역사학자들의 핵심 주장들이 이미 이 시기에 정립된 셈이다. 이 국사찾기협의회는 박창암을 비롯,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임승국, 이유립, 박사인, 이대위 등 사이비역사학의 핵심 인물들이 참여했으며, 『자유』 1976년 1월호부터는 이들의 글이 다른 필자를 밀어내고 잡지의 대부분을 채웠다. 그리하여 1977년 1월호부터는 명실공히 “국사찾기협의회 대변지”임을 속표지에 써 붙이고, 이 잡지가 문예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발행되고 있음을 천명하였다.
국사찾기협의회가 결성되고 국사찾기운동이 시작되자 여기에 참여한 단체와 대표들 중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있다.
*한국고전문우회(임승국), *단단학회(이유립)ㅡ 모두 위서 「환단고기」를 널리 알린 인물들이다.
이들이 1976년 4월 정리한 “한국사연표”에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던 북한과 중국의 존재가 아예 지워져 있다. 중국의 역사까지 다 “우리 환국”의 역사로 포함한 사이비역사학의 기획 속에, 이들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으로 포함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이비역사학자들의 “민족사관”이 뿌리깊은 반공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반공의 “민족” 개념은 박정희 정부의 구미에도 맞는 것이었으며, 『자유』지의 사이비역사학자들은 지면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이 박정희 정부의 주장과 부합함을 반복해서 강조하였다. 이유립이 활동한 ‘단단학회(檀檀學會)’는 1977년 2월 기고한 글의 서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요지”를 길게 인용했고, 1977년 4월 임승국은 그의 글 마지막에 올바른 국가관에 대한 박대통령의 언급을 인용하였다. 실제로 1976년 11월 최규하 국무총리가 국사교과서의 단군신화 부분을 개정할 것을 약속하자, 『자유』지는 이를 환영하며, 드디어 자신들의 주장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무총리의 말을 통해 “공신성”을 얻게 되었다고 환호하였다.
이렇듯 사이비역사학자들의 사관은 “민족사관”이라기보다 “반공-냉전사관”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상고사의 숨은 뜻이란, 냉전 질서로 쪼개진 자유 진영의 한 편에서 상대를 의식하며 체제와 사상의 우월성을 스스로 부풀리는 데 있었다. “만주 고토”의 회복을 넘어선 “중원 호령”의 있지도 않은 상고사의 “정통”이란 곧, 반공적 “민족”의 자긍심을 위한 것이었다. 짐짓 9천년의 역사를 아우르는 유라시아의 규모로 역사와 영토 부풀리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이었다.
1980년대에도 “민족사관”이 강조되는 흐름이 지속되었다. 임승국은 제5공화국을 맞이하여 “제1조국-환국, 제2조국-환웅의 나라, 제3조국-단군왕검의 고조선, 제4조국-부여 삼국시대 고려왕조, 제5조국-제5공화국”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그들이 외쳤던 유구한 상고사, 곧 “한국사의 발견”의 끄트머리에 제5공화국이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김대현, 「사이비역사학자들의 이상한 민족주의」-상고사(上古史)에 숨은 군부독재의 유산-)
『환단고기』는 1979년 출판되기 전까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의 소장자라 주장하는 이유립이 내던 『커발한』과 월간지 『자유』에 『환단고기』의 내용이 일부 공개되었을 뿐이다.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고대사를 비밀리에 전해 온 역사책이라고 주장하는 가짜 역사책(위서僞書)이다.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사람이 지은 책들을 묶어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진짜 그 시대에 만들어진 책들이 아니다. 이 책은 현대에 만들어졌다.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고대의 인물들이 만든 책이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환단고기』의 소유자였던 이유립이 가상의 인물인 계연수라는 사람을 내세워 삼성기(상), 삼성기(하), 북부여기, 태백일사, 단군세기 등을 묶어 편찬한 것이다.
▲ 강화 마니산, 단단학회 태백교 단군성전... 현재는 경천신명회에서 관리 |
이유립은 북한 출신으로 해방 후에 빈 몸으로 남하했다. 그러니 설령 집안에 비전의 책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가져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1970년대가 되어서 갑자기 자신이 해방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면서 『환단고기』를 꺼내들었다.
내용을 보면, 우리 민족은 고조선 이전 기원전 7191년 또는 기원전 6만년 전 환국을 세웠고, 환인이 나라를 통치했는데 역대 환인은 모두 7명이며 3천년 혹은 6만3182년을 다스렸다고 한다. 영토는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1리가 약 400m 전후인 것을 기준으로 하면 엄청나다. 그 넓은 땅에 수밀이국, 일군국 등 12개 국가가 있었다? 이들이 와서 조공을 바쳤다. 환국 이후 기원전 3800년 경 배달국이 등장하고, 환웅이 통치하며 태백산의 신시(神市)를 수도로 했다고 한다.
총 18명의 환인이 1565년 동안 다스렸고, 이 시기부터 중국에서 나타난 세력과의 갈등이 나오는데 중국 신화의 여러 고대 신들을 짜깁기해서 넣은 것이다. 내용을 보면, 환국에서 환웅과 같이 갈라져 나온 중국 신화의 반고가 둔황 인근 삼위산에 기거하였고 5대 환웅의 아들인 복희씨가 중국에 들어가 세력을 이루었으며 이후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온 소전씨 아들 신농씨가 공상을 경계로 배달국과 국경을 접했다. 이후 14대 환웅 때 갈등이 본격화 되었는데 이때가 바로 치우천왕시기이고 치우천왕은 금속으로 된 갑옷과 무기를 만들었으며 신농씨 후손인 유망을 토벌하고 중국 쪽에 자리잡은 세력을 몰아냈으며 헌원씨에게 항복을 받고 산둥성, 허난성, 허베이성 일대를 점령하였다고 한다.
이후 18대 마지막 환웅이 웅녀와 결혼해 태어난 왕검이 기원전 2333년 조선을 건국했고, 47명의 단군이 2095년 동안 다스렸으며 영토를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누어 다스리고 중국에 치수 기술을 전수했다고 한다. 그중 3대 단군이 가림토 문자를 만들어 한글이 세종이 아니라 이때 만들었다고 한다. 영토도 일본을 징벌하고 엄청난 정복활동을 하여 이때 인구가 1억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1억이나 되는 인구가 존재했다면서 남겨진 고고학적 자료들이 없다. 거기에다 근대 이후 일본에서 쓰인 용어들이 등장하고, 17세기 이전에는 등장할 수 없는 근대에 쓰인 지명들이 나오며, 자국의 영토를 역사서에 기록하는데 추상적인 표현으로 기록했다. 무엇보다 삼성기는 저자가 잘못되었다.
원본이 없기 때문에 검증, 입증 자료들도 없다.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 날조,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책이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임승국에 의해 1986년 한글 번역서 『한단고기』를 내놓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리고 그즈음 1985년 단군을 숭앙하는 종교들을 모아 민족종교협의회가 창설된다.
환단고기의 진실(신동아, 2007년 9월호)을 보면, 이유립의 조언으로 전두환이 ‘국풍 81’을 개최했다고 나온다. 이유립의 일방적인 증언이므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정당성이 없는 권력이 체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벤트를 이유립이 적극 지지해주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1980년은 전두환이 광주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해이다. 광주의 핏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임승국은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자 전두환에게 아부했다.
그는 민족주의를 반공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았다.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도 국가안보(반공)라며, 그 연장선상에서 역사를 국가체제철학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역사는 오직 국가 안보와 반공이라는 목적 하에 이용되는 것이고 독재도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용납된다. 이미 유신체제가 해체된 상황에서 그는 아직도 독재를 옹호하고 있다.
사이비역사학 역시 박정희의 민족주의에 기생했다.
한국사에 대한 깊은 열등감은 사이비역사학이 지향하는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배양하는 배양조 역할을 했다.
2013년 8·15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셨다. 이 말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구절이며, 이암(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이암, 이기는 모두 이유립과 같은 고성 이씨 문중의 사람들이다.)은 환단고기의 감수자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의 연설문에 환단고기가 인용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이비역사학적 인식을 내비친 정권이 추진한 국정교과서인 만큼, 역사학계는 사이비역사학의 영향력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서 『환단고기』의 역사를 전하고 있는 단월드 국학원 측에 질의하였으나 홍보국에 전달해 답변해주겠다 하더니 응답이 없었고, 국학원을 찾아 관계자들을 만나 문의하였으나, 조선 상고사를 읽어보라는 얘기만 하였다.
*참고문헌: ∙이유립 저, 『커발한 1호』(1965.4.1.), ∙이유립 저, 『커발한 문화사상사 1~2권), ∙이유립 저, 『환단고기』, (1979), ∙임승국 번역․주해(55인쇄), 2014, 정신세계사, ∙이문영 저, 『유사역사학 비판』,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2017봄, 통권118호), ∙『대종교 경전』(2002, 대종교출판사), ∙김대현, 「사이비역사학자들의 이상한 민족주의」-상고사(上古史)에 숨은 군부독재의 유산-
오명옥 omyk7789@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