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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죽음과 삶

기사승인 2017.01.13  16:3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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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은 삭개오와 같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살려고 합니다.

 

손종기 목사 – 하남은광교회 원로목사

(갈2:19-20)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성도는 죽음이 없습니다. 영생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죽어야 하는가요? 반드시 옛 사람은 죽어야합니다. 참된 구원받은 성도 모습은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으로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 가운데 중심 메시지는 성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특히 본문에서 그러한 삶과 죽음의 관계를 율법과 연관지어 설명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성도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또한 무엇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지 대단히 과감하고 명확하게 제시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삶은 보다 윤리적으로 규범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조건 온유해야 하고, 강한 어감의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되고, 진리를 사수하는 용기보다 인간적으로 친근해야 하는 등의 성도의 삶을 윤리로 규격화시키는 풍조에 대해 본문은 진실 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리의 말씀 가운데 원칙적인 측면에서 설명고 있습니다.


1. 먼저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19 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라는 말은 율법의 역할 또는 목적으로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완전히 지키지 못한 다면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망을 주기 때문에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모든 소망을 버리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길을 발견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본 절에서 ‘내가’라는 1인칭 표현을 통하여 자신에게 일어났던 바울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설명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히 충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만 보았지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음에 넘겨주는 악행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었고 나름대로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는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라는 말에서 ‘죽었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다논’은 모든 관계가 단절되므로 더 이상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라는 말은‘율법을 의지하고 그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받으려는 소망을 버리게 됨으로서 율법과 관계를 끝내버리고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율법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자 인간적인 차원에서 추구하였던 의와 열심 등을 모두 버린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과거의 잘못된 열심을 모두 버린 이유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끊어졌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시작한다. 는 뜻입니다. 이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만난 자만이 형식적인 의와 거짓된 외식들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거짓된 위선의 껍데기를 버리는 것이 바로 성도의 진정한 의미의 '죽는 삶'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남들에게 나쁘게 평가받는 것을 두려워한 외식적인 행동하고 입에 발린 ‘칭찬의 말'하여 겉으로 꾸미기에 급급한 외식적 경건 등은 모두 버리고 그러한 외식을 추구하는 마음을 죽여야만 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그렇게 죽이고 포기할 때에만 주님과 바른 교재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외식적 체면, 탐심으로 모운 재물 등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결코 심령이 가난하고 의롭게 살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회적인 체면 유지로 교회출입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과봉사로, 외식하는 자들은 분명코 주님의 참된 사랑과 주님의 거룩한 뜻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 공동체에서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 누가복음 19:8에 등장한 삭개오입니다. 그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삭개오의 고백은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한 자의 진실한 고백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만난 삭개오에게서 마음속에 있는 탐심이 무너지고, 새롭게 구별된 삶을 살려는 강한 의욕으로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비단 삭개오 한 사람에게만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은 삭개오와 같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살려고 합니다. 성경 에베소서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2.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는 말씀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의 이 구절의 의미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에 대하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죽으셨다 바로 그때 나도 함께 죽었다. ’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죄의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는 죽게 되었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은 헬라어‘쉬네스타우로마이’라는 단어로 합성어인데 성도가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는 그리스도의 체험이 성도의 체험이 되도록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 효력이 성도들에게 미치고 있습니다.'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절). 바울이 설명한 새로운 삶은 율법이나 죄에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삶이요, 새 생명을 덧입게 된 부활을 믿는 신앙의 삶입니다. 성경 로마서 6: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사람'이 산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실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방향과 의미를 깊이 깨달은 사도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형식적인 경건, 외식적인 선행, 규범의 준수 등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모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예전에 중요하게 여겼던 지식과 재물이나 명예 등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제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알게 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참된 의와 사랑이신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만이 의미가 있는 중요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7-9 “7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절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삶이 개인들이 처한 삶의 양태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측면에서 다른 형제들이 살아가는 삶과 그 모습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 열두 명은 개성과 성격이 제각기 다른 모습이었지만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에 그런 모습을 결코 개별적으로 책망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도들의 삶은 그와 같이 다양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경건이나 외양 등을 인간적인 안목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복잡함을 인정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성도의 삶은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중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은 바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생명의 근원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라고 말씀하셨던 그 내용을 확증하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신 분이라는 설명이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참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생명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충족시키는 분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성도가 의롭고 바른길을 살아갈 때에 그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아야만 합니다. 주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환란을 이길 힘을 얻고,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계속해서 지도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자가 그분의 힘을 계속 공급받지 못하고 스스로의 능력과 힘만을 의지할 때, 그는 분명코 올바른 삶의 길에서 실족할 위험을 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맺는 말

성경을 많이 읽고 잘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아는 것이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신앙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되어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의 고백을 통하여 그러한 삶을 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손종기 목사 – 하남은광교회 원로목사

 

종교와 진리 webmaster@churchheres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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