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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신학의 신학적 선구자들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논의

기사승인 2019.06.25  22: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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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 동성애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드러나고 비밀리에 동성애를 관계에 있던 분들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선언하는 일[coming out]이 자주 나타나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또한 동성애자들을 옹호하는 신학적 논의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 중의 일부는 소위 퀴어 신학이라는 이름을 제시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런 퀴어 신학의 선구자들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정통적 기독교에서는 동성애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먼저 동성애 문제는 오늘날에 나타난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지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간들의 타락한 이후로 인간들이 행하는 여러 가지 일 가운데 동성애도 계속해서 역사 속에 있어 왔다. 이스라엘이 그들 가운데 살던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서는 동성애의 관습을 포함한 온갖 성적인 무질서가 성행했으며, 가나안 종교 의식 가운데서는 남성 성전 창기(male cult prostitute)와의 성적인 관계가 포함되어 있어서 가나안 사회와 그들과 더불어 살던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상당 기간 많은 남성 성전 창기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대 희랍과 로마 사회에서 동성애는 매우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행위였다. 심지어 플라톤의 글에서도 동성애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향연󰡕(Symposium)에서는 동성애가 사람을 성숙시키며 상승시키는 사랑인 “에로스”의 좋은 양태로 제시되고 있을 정도이다. 헬라 문화에서 특히 나이 어린이와 나이 많은 동성간의 관계(pederasty, παιδοφθορία)는 특히 젊은이의 교육의 완성을 위해 고귀하고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타락한 인간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있지 않은 적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이다.

이렇게 온 세상에 퍼져 있고, 역사 속에 만연해 있기에 동성애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입장을 강조하는 퀴어 신학의 선구자들의 논의를 살펴보고, 이에 대해서 정통파 기독교는 과연 어떤 입장을 가지는 것인지를 논의해 보기로 하자.

1. 퀴어 신학의 선구자들의 논의의 예

퀴어 신학의 선구자들은 창세기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언급된 구절들을 주석하면서 이 구절은 동성애를 문제 삼는 구절이 아니라고 오히려 자신들의 도성(都城)으로 찾아 온 사람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에 대해서 배타적으로 굴며, 그들에게 텃세를 부리고 그들에게 해를 가하려 한 것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원인이 되는 죄악이라고 논의하려고 한다. 이런 논의의 고전적이고도 영향력 있는 예로 우리는 셜윈 베일리(D. Sherwin Bailey)의 󰡔동성애와 서구 기독교 전통󰡕을 들 수 있다. 베일리는 이 책에서 창세기 19:5과 사사기 19:22의 “안다”는 뜻의 동사 “야다”(ע󰕈󰖷)가 성적(性的) 함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이 논제를 세우기 위해서 그는 (1) 구약성경에서 “알다”라는 뜻의 “야다”(ע󰕈󰖷)라는 동사가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사용된 900여회에 비교해서 성적(性的) 함의를 지니고 사용된 예가 단지 15번뿐이라는 통계와 (2) 성교가 개인적으로 친숙한 앎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육체적 성적 경험 그 자체만이 아니라, 성적인 차이에 대한 의식과 보완 의식이 있어야 만 한다”는 심리적 이유, 그리고 (3) 롯과 사사기 19장의 주인이 모두 그 땅의 우거자들(gērîm)이었는데 “롯이 그 신임성을 점검해 보지도 않은 낯선 두 사람을 자기 집에 들임으로 우거자(gēr)의 권리 이상을 행사한 것이므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이라는 추론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은 이 보다 더한 논의들이 퀴어 신학의 이름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2. 기독교적 사유의 원칙: 계시 의존 사색

정통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성경 계시에 의존해서 사색[啓示依存思索]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경에 근거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에 대해서도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따라서 생각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이 근본적으로 사랑의 행위였고, 사랑의 창조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떠하심을 보여 준 것이 사랑의 근원적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참 사랑은 무원칙적이지 않고, 분명한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선언한다(롬 12:9). 이는 사랑 일반에 대해서 하는 말이지만, 남녀간의 사랑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모든 면에서 그러하니,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내신 원칙에 따르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애와 혼인, 그리고 성(性) 문제나 모든 친밀한 인간관계와 관련된 사랑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내신 어떤 원리가 있는지를 성경으로부터 찾아보려고 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변화하는 이 세상의 문화에 따라, 또는 세상의 동향에 따라서, 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는 일은 옳지 않은 일이다.

2-1. 사랑에 대한 구약 성경의 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원리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실 계획을 가지시고, 먼저 남자를 만드신 후에(창 2:7), 사람의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 자신이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즉,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자]를 지으시리라고 말씀하시고(창 2:18), 남자로 하여금 자신이 혼자이며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심리적 필요를 느끼게 하신 뒤에(창 2:19-20), 여자를 만드셔서 그 둘이 한 몸을 이루고 살게 하셨다(창 2:24). 여기에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혼인의 시작이 있다. 사랑은 모든 면에서의 하나 됨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정서이다. 영적, 정신적, 인격적, 신체적 하나 됨에서 사랑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의 혼인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진정한 하나 됨을 위해서는 사랑이 필수적으로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결국 하나님을 중간 언어로 하는 사랑이다. 두 사람이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이를 더욱 사랑하게 될 때에야 그것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의도하신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대립될 때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은 결국 상대편을 세워주는(up-building) 것이어야 한다. 결국은 상대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다. 또한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잘 세워가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다.

이하 종교와진리 7월호에서...

이승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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