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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팽창... 우리에게는 채찍, 반성 촉구

기사승인 2021.07.13  14:4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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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해석 교수, 기독교 내부의 부패 씻고, 이단과는 ‘투쟁하라’ 권고

*유해석 교수(총신대 교양교직과 전임)의 “이슬람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견해”라는 원고를 받아 정리하였다. 이슬람의 도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단문제는 교리적으로 비판하면서도, 선교와 개종이 뒤따라야 함을 다시금 되새긴다.

 

▲ 8일, 예장 합동총회 이슬람대책위원회 주최, 이슬람아카데미에서 유해석 교수 강의

유해석 교수는 “오늘날의 유럽의 경계는 이슬람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다. 서구 기독교와 중동의 이슬람은 무함마드 이후부터 전쟁과 갈등의 역사였다”고 하면서,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그의 나이 40대 중반 무렵인 1529년, 「터키를 대항한 전쟁에 대하여」와 「터키를 대항하는 군대 설교」를 한 것으로 보아, 이슬람의 도전이 그에게도 심각한 자극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특별히 그 때 그들이 직면한 문제는 이념적으로 고무된 폭력의 출현, 기독교와 무슬림 사이의 자각과 접촉의 전례 없는 수준 그리고 재기하는 이슬람 문화를 직면하는 반면에 기독교 문화의 붕괴 상황이었다고 하였다.

기독교 문화가 붕괴될 즈음, 이슬람 문화는 팽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루터는 이에 대하여, 자신의 신앙을 더욱 견실히 할 뿐만 아니라 더욱 담대하게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라고 권고하였다고 한다.

유해석 교수는 “루터는 이슬람이 공격해오는 것에 대하여, 그것을 회개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채찍으로 이해했다. 신학과 믿음의 타락, 그로 인하여 영적으로 어두워진 교회를 향한 징계와 채찍으로 이슬람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알아야 한다. 오늘 날도 이슬람보다 타락한 기독교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우선 싸워야 할 것은 기독교 내부의 부패, 거짓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말이다.”라며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였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또한 그가 태어난 1509년 당시 유럽의 4분의1은 이슬람에 의하여 정복당하였고, 이후에도 계속 유럽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던 때였다.

유 교수는 이슬람에 대한 칼빈의 태도는, 상당히 엄격하게 신학적 오류를 지적했다면서 몇 가지 특징을 정리해 이해를 도왔다.

첫째, 참된 진리가 있는 교회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태도였다. 이슬람도 참된 진리가 있는 교회로 돌아오기 위하여 노력하되, 경제적 제재를 가한다든지, 비인간적 대우를 한다든지, 무기를 통한 협박같은 것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비와 부드러움으로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덕스러운 삶으로 돌아서게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칼빈 역시 루터와 마찬가지로 처음과는 달리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을 비롯하여 그의 설교와 주석을 살펴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교리적·신학적 입장에서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칼빈은 무함마드를 ‘거짓 선지자’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신명기 13장 1절 이하에 관한 설교에서, “기독교 신앙은 (삼위)하나님에게로 나아가지 않는 자들이 반대하는데, 그들은 바로 무슬림들, 이방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은 신성모독을 하였고, 교회로부터 마치 썩은 가지처럼 철저히 단절되었으며, 그들이 복음에 대하여 저항하거나 기독교를 없애기 위하여 애쓰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놀랄 일도 아니라고 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빈은 무함마드를 ‘배교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메카에서 살면서 실제로 에비온파(Ebionite)의 영향을 받았다. 왜냐하면 무함마드의 부인 카디자(Khadija)가 에비온파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무함마드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이븐 와라카 나우팔(Ibn Waraqua Naufal)은 메카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그 역시 에비온파의 사제였다. 에비온파는 A.D. 70년 로마의 티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만들어진 종파로서 기독교인이면서도 유대교의 강조점을 보존하였다. 당시에는 메카에 에비온파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무함마드는 에비온파에서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기에 칼빈은 무함마드를 ‘배교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셋째, 이슬람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일신론적 이단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무슬림들도 천지의 창조자는 하나님이라고 힘껏 외치지만,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우상으로서 진정한 하나님을 대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자기의 머리로 모시지 않는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그 지식은 한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슬람의 알라는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또한 위격이 없이 단일하다. “알라와 선지자를 믿되 삼위일체설을 말하지 말라 너희에게 복이 되리라 실로 알라는 한 분이시니 그 분에게는 아들이 있을 수 없다”(꾸란 4:171). 그래서 칼빈은 이슬람을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일신론적 이단으로 이해했다.

넷째, 이슬람을 적(敵)그리스도로 보았다. 무함마드 배후에 사탄이 역사하고 있으며, 그것이 적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신명기 설교(13:6-11)를 통해서 칼빈은 “무함마드는 투르크인들이 그들의 무함마드를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있는데, 그는 “그런 자들은 그들 자신이 고안하여 만들어내는 악마”일 뿐이라고 했다. 칼빈이 이슬람을 향해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한 것은 배후에 사탄이 역사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무슬림 자체가 적그리스도라는 뜻이 아니었다.

다섯 째, 칼빈은 이러한 교리적·신학적 잘못을 단호히 배격하고, 비판하면서도 이슬람 역시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이슬람이 바른 진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촉구하였고 기대하였다. 이슬람 역시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어야 하며,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선교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면서 유해석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서구 기독교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무관심으로 인하여, 성경이 아랍어로 번역된 것은 이슬람이 시작된 지 227년이 지난 837년이었고, 정작 아랍어 성경이 출판된 것은 1516년이다. 이는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서구가 이슬람에 대한 심리적 원수관계로 인하여 이슬람 선교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세계 무슬림들의 80%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기독교가 발전하고 융성했던 곳들이 이슬람으로 대체된 것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기독교가 변질되고, 골고다 산상의 십자가를 자신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때, 이슬람이 몰려왔고, 그에 대항할 만한 능력을 상실한 채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는 그 주권을 이슬람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중동이 그랬고, 유럽이 그 길을 가고 있다. 한국도 이슬람이 다가오고 있다. 이 중요한 시기에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다시 개혁을 논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이슬람으로 인하여 종교개혁을 가속화 시켰던 마르틴 루터의 말을 되돌아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슬람에 대하여 대항하여 싸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비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더 개선하자는 것이다.”

이슬람은 적그리스도요 일신론적 이단이라 규정하며 교리적으로 비판하면서도, 선교와 개종 가능성은 열어 놓은 것이다.

 

 

오명옥 omyk7788@daum.net

<저작권자 © 종교와 진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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