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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하다, 만들다출 34:10
   

한신대 구약학 김창주 교수

성막건립과 황금 송아지 사건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현시하여 새 언약을 맺는다. 이 과정에 창조의 동사 ‘바라’(ארב)와 ‘아싸’(השׂע)가 쓰였다.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וארבנ)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השׂע) 것이라’(출 34:10). <개역개정>은 두 동사를 차이 없이 ‘행하다’로 옮겼지만 10절에서 바라는 한 차례, 아싸는 3 차례가 활용되었다. 출애굽기 맥락에서 볼 때 언약의 파기는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단절을 뜻한다. 그럼에도 모세의 중재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 과정에 활용된 두 동사는 성막건립과 새로운 언약 체결 사이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에 주의 깊게 살펴보려고 한다.

구약에서 바라는 하나님의 절대적 위엄과 창조주의 권능을 보여주는 동사다(민 16:30; 사 65:17; 렘 31:22). 특히 바라 칼(Qal) 동사는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창조의 능력을 묘사하는데 창세기와 이사야 40장 이하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이미 알려진 대로다(창 1:1,21,27, 5:1,2; 사 40:26, 42:5, 43:1,15, 45:15 등). 흔히 바라 동사가 말씀에 의한 창조나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의 근거로 간주되기도 한다. <무로부터 창조는 마카비하 7:28을 참조하라> 본문의 바라는 니팔(Niphal) 3인칭 복수 완료태다. 창세기 2장에서 하늘과 땅의 창조 묘사에서 알 수 있듯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일이거나(창 2:4; 5:2; 시 104:30), 기적적인 현상을 서술할 때 주로 활용된다(출 3:20; 사 48:7).

한편 아싸가 창조의 동사로 쓰일 때는 하나님의 의지가 실현되는 상황이다(창 1:7, 16, 25). 그렇다고 해서 말씀에 의한 창조와 반대되는 행위를 통한 창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편 33은 말씀에 의한 창조를 명확히 노래한다. “야웨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 받았으며(השׂע) 그의 입김으로 만상이 드러났도다”(시 33:6). 본문에 세 차례 언급된 아싸 동사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극대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השׂע)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야웨의 행하심(השׂעמ)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השׂע)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위와 같이 바라와 아싸 동사는 사실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하여 의미상의 차이 없이 동의어처럼 활용된다(창 1:31; 2:2; 3:1; 민 16:28, 30; 사 41:20; 43:7; 45:7, 12).

출애굽기 34장 10절에서 창조의 동사 ‘바라’와 ‘아싸’를 함께 활용한 이유가 있다. 우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이 파기되자 성막 건립도 중단된다. 불현듯 혼란과 불신이 소용돌이친다. 그럼에도 새로이 돌판을 준비하여 언약을 다시 맺는다. 이것은 마치 태초의 창조처럼 이전에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야웨의 행하심(השׂעמ)이다. 놀랍고 두려운 일이다(민 16:28-30). 야웨는 출애굽 서두에서 바로가 다스리는 이집트에서 이적을 약속한 바 있는데(출 3:20) 그것은 창조 권능처럼 이전에 결코 볼 수 없던 하나님이 일으킨 새로운 일이었다(10절). 이와 같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활동을 나타내기 위한 가장 신학적인 낱말은 곧 말씀의 위엄과 창조 과정을 보여준 ‘바라’와 ‘아싸’다. 예컨대 이미 성사된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이 결성하는 일이야말로 창조에 버금가는 사건이며 전례가 없는 경우다(사 48:7).

출애굽기에서 창조의 언어 바라(ארב)와 아싸(השׂע)를 활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문에 쓰인 두 동사 바라와 아싸는 창조의 아침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곧 바빌론 포로기의 암울한 현실에서 창조의 어휘들을 동원하여 희망을 일깨웠듯 언약의 파기와 황금 송아지 사건의 어수선한 상황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창조적인 과업을 일관되게 수행하신다. 바라와 아싸는 그 모든 과정과 결과의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함축하는 동사다.

김창주 교수  webmaster@kidokl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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