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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선교 130년 역사 속에서 무엇을 했나(?)한국의 문화와 전통, 우상으로 매도 문화적충돌 야기

전통적인 한국문화 무시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30년이 지났다. 개신교 130년의 역사 속에서, 가난한 이 땅의 백성들에게 어떤 희망을 주었는가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한국에 전파된 개신교가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고, 우상으로 매도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다가 준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영미의 선교사들이 침략의 도구가 아닌 복음을 앞세우고, 이 땅에 기독교를 뿌리내리게 했다는 점이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선교사와 교회의 지도층과는 상관없이 애국지사들이 교회로 흘러 들어와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했던 것만 보아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1운동은 기독교의 평등사상과 민주적인 훈련, 민족해방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가진 기독교의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초기 한국의 개신교는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고, 서양문화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우리문화와 서양문화의 충돌을 야기시켰다. 당시 영미는 아시아를 경제적, 군사적 침략하기 전, 먼저 선교사들을 앞세웠다. 이것은 피선교지 국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결국 일본에게 침략당한 조선에서 서양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이 불가능했다. 이로 인해 영미의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경제적, 군사적 침략을 피하는 대신 복음을 쉽게 전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미의 선교사들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오히려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 하거나, 남의 일로 보아 넘겼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 해주고, 조선의 백성을 천박하고, 미개한 백성으로 평가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한국을 방문한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목사의 저서인 <극동의 지배>에서 영미선교사들이 조선의 백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 한국개신교는 이 땅에 들어온 지 130년이 되었다. 130년의 역사 속에서 이 땅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초기 한국의 개신교는 우리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고, 가례와 부락제, 모든 제사의식을 우상으로 간주했다. 자연스럽게 기독교는 민족문화와 단절될 수밖에 없었으며, 서양문화와 충돌을 야기시켰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그리스도교와 서구문화를 구분할 수 있는 사고의식조차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조선의 백성은 서구문화에 쉽게 동화됐다. 한마디로 조선의 백성들은 그리스도교를 토착화하는데 실패하고, 그들의 문화에 동화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의 문화는 공동체적인 삶속에서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민족문화이다. 문화를 우상으로 보고, 깨트려버린 것은, 생산 공동체를 담아 나르는 조선 가난한 백성의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틀을 깨버린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의 멋과 가락, 그리고 풍속은 우상으로 왜곡되어 교회 안에서 금기되었다. 가난한사람들의 역동성을 제공했던 민요를 부르는 것마저도 불경스럽게 여겼다.

이러한 몰지각성과 전투적인 근본주의 신앙양태는 결국 개신교 선교 130년이 지난 지금, 전통적인 우리의 멋과 건축양식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내지를 못했을 뿐만 아니라, 100억 아니 3000억짜리 서양식 교회당을 건축하는 등 바벨과 맘몬을 노래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대부분은 식민 자본주의 점령세력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거나,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은폐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주입시키는 가사와 곡조로 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반성과 비판 없이 앵무새처럼 따라 부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 나아가 이 곡과 가사를 가지고, 2개의 찬송가를 만들어 그리스도인들을 분열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2개의 찬송가 분열은 1930대에도 있었다.
 
이렇게 한국개신교가 ‘바벨’과 ‘맘몬’을 노래한 나머지, 한국개신교는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면서, 부자들의 종교로 변질됐다. 예수를 시멘트와 신학의 틀에 가두어 성서를 왜곡시키는 잘못을 범했다.

그렇다고 개신교가 130년의 역사 속에서 문제만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본식민지 아래서 고난당하는 민족과, 봉건질서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가난한 백성에게 양성평등의 사상과 한글보급운동, 인권신장, 민주시민으로서의 성숙해지는 것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병원을 설립해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해 주었으며, 학교를 설립해 민족을 일깨우는 일에 크게 공헌했다.  
 

한국적 상황에 맞게 주체적으로 그리스도교 받아들였는가(?)

“교회의 조직과 민주적인 훈련, 양성평등사상은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서양문화 무조건적 수용, 대신 우리의 멋과 가락(민요) 실종시키는 결과를 초래

양성평등의 사상에 크게 기여

한국개신교인들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그리스도교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주체적으로 받아들인 면도 있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는 민족사에 여러 가지 큰 공헌을 했다는 결론이다. 먼저 성경읽기와 관련, 한글보급운동을 전개, 민중들이 한글을 깨우침으로 민족적 자각의 무기를 갖추게 했다. 민주주의 형성과 보급에 큰 역할을 주었으며, 기독교인들의 한글 보급운동이 없었다면, 한글판 독립신문 발행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글보급이 교회를 중심으로 전국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번져나가면서, 민권운동의 기초를 만들어 냈다. 즉 신분과 계급을 타파할 수 있었다. 평등의 사상이 도입됨으로써 조선의 봉건적 질서를 무너트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민중은 제도적인 교회의 껍질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한국인의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 갔다. 이것은 3.1만세운동에서 그대로 나타났으며,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가진 민족주의자들을 교회로 불러들였다.
 
그럼에도 3.1만세운동을 비롯한 개신교인들의 독립운동이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팽배했다. 하지만, 3.1만세운동은 당시 조선의 가장 큰 교회의 조직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 땅의 기층민중들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독립운동이었다. 평등사상과 민주적 훈련, 그리고 교회의 조직 없이 과연 3.1운동이 가능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3.1만세운동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겉으로 드러난 33인 민족대표 중 16인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만을 부각시킬 뿐, 3.1운동의 저변에 깔려 있는 사상에 대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아무튼 3.1만세운동은 선교사와 교회지도층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기독농민들과 기독여성들, 그리고 기층민중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사적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를 재해석하여 받아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문동환 교수는 ‘한국적 그리스도인 상의 모색’이란 주제의 글에서 “한국의 그리스도가 한국의 문화에 끼친 영향중에서 한 가지를 시론적으로 거론한다면, 그것은 3.1운동이다. 3.1운동은 그리스도교의 헤브라이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서, “헤브라이즘의 특성은 인간의 이성과 감정보다는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 한마디로 변증법적 투쟁이다. 비합리적인 것에 체념하거나, 좌절하지를 않고, 다시 일어나는 역동성, 달걀로나마 바위를 깨뜨리려는 의지, 눈으로 보이거나 설명할 수 없음에도, 주저하지 않고 계속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불굴성 등이다. 그것이 3.1운동으로 표출됐다”고 그리스도교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희망의 종교로서, 민중들을 깨우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우리문화와 단절

한국의 기독교가 우리의 민족문화와 단절되어 활동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민중의 기층문화를 왜곡하고, 말살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민중(민족)문화를 왜곡하고, 말살하려 했던 것은, 그리스도교와 서구문화를 구분하는 성서적인 사고조차 하지를 못했던 상황에서 당연했던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교 이외의 모든 것이 우상으로 취급되었다.

조선의 기층민중은 문화의 토대를 노동과 공동체의 삶에 두었다는 점에서 매우 이율배반적이었다. 기층민중은 문화의 토대를 종교로 표현하기도 했다. 가례와 부락제를 통해서 표현되는 모는 종교의례와 세시풍습이, 서구 선교사와, 그들에게서 교육을 받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우상숭배로 보였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우리의 고유문화를 터부시하고, 생산공동체의 문화를 담아 나르는 기복적인 커다란 틀을 깨트려 버렸다. 심지어 초기 영미선교사들은 조선의 가난하고, 억눌린 백성을, 천박하고, 미개한 백성으로 불렀다. 대신 일본 제국주의를 우수한 백성, 선진국으로 평가하면서, 조선의 선교사들은 일본에 협력할 의무가 있다고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이것은 당시 조선을 방문한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목사의 <극동의 지배>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결과 한국기독교에서 ‘우리의 멋’과 전통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민중의 노래인 ‘민요’만 불러도 불경한 그리스도인으로 치부됐다. 민중들의 해악과 아픔을 드러내는 탈춤마저 왜곡해 버렸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우리조상 모두는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에 갔다는 말을 서슴치 않고 있다.

이러한 잘못은 전통적인 우리의 멋과 건축양식을 창조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했다. 선교 1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고유의 멋과 창조적인 교회당 건축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를 않다는데서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찬송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한국찬송가 대부분은 식민 자본주의의 점령세력에게 용기를 북돋우거나, 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은폐하는 이원적 사고를 주입시키는 가사와 곡조로 되어 있는 서양의 것임에도, 비판과 반성 없이 직수입하여 부르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것마저도 오늘 분열돼, 교인들의 공예배에 혼란을 주고 있다.

서구적인 가치판단 전통문화 훼손

아서 브라운의 말과 같이 우리민족의 정신문화와 대표적인 공동체적인 삶은, 천박하게 취급되었다. 따라서 한국기독교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은 대부분 서구인이었다. 한국적 정신의 위대성과 위대한 인간상이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철저하게 짓밟혔다. 그리고 공동체적인 삶과 노동에 뿌리를 두고 있던 민중의 문화도 철저하게 거절되었다. 이것은 오늘 한국기독교가 부자들을 위한 종교로 변질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서구의 식민세력과 그리스도교가 손을 잡고, 이 땅에 들어오지를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식민 제국주의와 대결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마지막까지 투쟁한 세력은 사회주의자 와 민중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민중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민족의식을 버리지 못했다. 이들은 한국개신교가 일제 국가주의에 굴복하고, 일제의 탄압이 악랄해지면서, 만주, 시베리아 등으로 건너가 민족해방운동에 가담했다. 또한 예배 때마다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도했다. 그 중심에 기독여성들이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본문이 에집트의 압제와 바벨제국에 저항한 모세와 하비루, 그리고 에스겔의 이야기였고, 요한묵시록이었다. 이것은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사들이 전해준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그리스도교를 민족주의적으로 재해석하여 받아들인 결과이다. 분명 그리스도교는 한국인의 민족적 자각에 큰 영향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60-70년대 한국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성서를 한국적 상황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계기를 가져다가 주었다. 기층민중이 주체가 된 민중 신학의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그리스도인들의 샤머니즘적인 신앙양태와 지배 이데올로기는 결국 한국적 상황에 맞는 그리스도교를 정착시키지를 못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연합을 하기도 했다. 이 두 단체가 분열될 때 한국기독교는 민족주의 진영에 섰으며, 결국 사회주의 진영에 섰던 그리스도인(이동휘, 여운형 등)은 그리스도교와 결별을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정신문화가 간직하고 있었던 신비주의적 뿌리를 그리스도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음에도, 그 뿌리를 제거하고 말았다. 명상과 신앙의 신비주의적 체험을 강조하는 동방교회의 전통은 거의 한국교회에 전달되지를 못했다. ‘믿음으로만’이라는 서방교회의 신앙전통은 종교적 자기수련과 연결되지 못함으로서 천박성으로 흐르는 결과를 낳았다. 한마디로 공동체성이 상실되고, 개인주의 경향으로 치닫고 말았다. 전통적 영성수련을 독단적인 교리에 의해 부정해 버리고, 비철학적인 말만 무성해졌다. 또한 ‘믿음’이라는 개념 자체도 제대로 이해하지를 못했다. 이 같은 믿음의 형태는 서구 것에 길들여진 나머지, 6.25 한국전쟁, 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교권주의와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민족의 아픔에 함께 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는 영미 교파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했다. 오늘 한국개신교가 수백개의 교단으로 갈라져, 분열과 갈등, 그리고 분쟁을 일삼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유달상 기자  yds12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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