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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 신앙생활 속에서 재해석해야변질된 한국교회 영성운동 점검한다(2) - ‘성령’ 구원론의 전통적 차원에서 재평가 절실
   
▲ 변질된 성령운동과 영성운동으로 그리스도의 선교를 몰각시킨 한국개신교 안에서 종교개혁의 목소리가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영성은 곧 하나님의 영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인간성 안에서 인간성을 새롭게 하는 생명력이요. 인간성의 구원의 능력이다. 성령은 구원론의 전통적 차원에서 평가해 왔다. 하지만 ‘성령의 구원’의 역사는 세계 상황 속에서 왜곡되어 왔다. 60-80년대 정치적, 사회적, 인종적,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몸부림이 커지면서, 성령의 역사가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됐다.

오늘 종교다원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불확실한 주장이다. 다른 종교의 어떤 요소들이 어떠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시인지가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다른 종교에서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종교적 정신성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신앙에 의해서 재해석 할 수 있다. 성령은 종교적 정신성이 아니다. 이 구별 없이는 그리스도인들은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한 분의 성령’, ‘자유의 영’, ‘생명의 영’에의 신앙에 입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종교적 정신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성령은 신학의 원천이며, 신학의 소재이다. 한마디로 종교적 정신성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 정신성의 표상(신, 귀신, 영, 악령, 상징)은 신학적인 소재가 될 수 있다. 성서에도 귀신을 비롯한 악령 등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종교적 정신성의 표상들이 하나님의 신성과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 혼돈되면 우상으로 둔갑된다. 이러한 우상은 예언자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정죄되었다.

서양의 그리스도의 선교는 서양의 지배문화와 물질문명의 우상과 합리성을 가지고, 그 표상들을 정죄했다. 종교적 정신성의 표상들은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신적 근거를 환상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한마디로 미신, 혼돈, 악마의 요인, 숙명론적 자유상실 등의 온갖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반역사적인 것이다. 또 역사적인 것들을 판별 할 수 없었다.

역사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은 다름 아닌 역사의 미래, 미래에로의 자유의 영이다. 한 분의 성령, 역사의 ‘구원의 영’에의 신앙은 눌린자의 해방을 위한 언어와 형상으로서 재현될 수 있다. 이것은 또 인간정신의 문제와 구원의 필요성울 제기하는 것들로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헌데 오늘 한국개신교가 말하는 영성, 성령은 이 같은 역사적 ‘구원의 영’을 몰각하고, 샤머니즘적인 수술적 신앙, 맘몬니즘적인 신앙관, 서양의 지배문화, 환상물 등에 매몰, 하나님의 영을 혼돈 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강단에서 유물론적인 돈의 소리가 끊이지를 않고, ‘돈의 크기’를 믿음의 척도로 오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또한 말만 앞세운 행함이 없는 기도, 신비적인 믿음, 물질을 최우선 생각하는 신앙 등이 바로 한국개신교가 말하는 영성이며, 이로 인해 한국개신교는 성서와 동떨어진 반성서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이 혼돈을 겪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성령의 역사하시는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제적인 조건을 앞세운 영성, 아니 성령운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개신교는 성령운동, 영성운동을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의 운동이 무엇인지를 몰각하고, 귀신을 내쫓고, 헌금을 많이 내는 물질적인 사고, 몸은 없고 유창한 기도소리를 내는 것 등을 영성, 성령운동으로 착각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진리를 몰각해버린 것이다. 오늘 한국개신교의 강단이 오염되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성령운동 몸의 현실적 차원에서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성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에 응답해야
“맘몬과 바벨 노래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없다”

성령은 자유로운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교의 영성, 아니 성령운동은 몸(행함)의 현실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행위하신다’는 신앙에 상응해서 신학은 역사적 맥락에서의 실천에서 시작된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그것은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운동이며, 바른 영성운동이다.

즉 새로운 인간성과 정의로운 삶의 새로운 질서,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등의 주제들이 성령의 차원에서 가려진다. 성령은 성서가 말하고 있는 대로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영이다. 지금까지 한국개신교는 성령을 믿는자의 영, 교회의 영으로 생각하여 ‘성령의 자유’를 구속시켰다. 그리고 변질된 영성운동, 성령운동을 벌이며, 교회의 강단을 ‘굿당’, ‘신당’으로 변질시켰다.

분명한 것은 자유로운 성령의 역사는 고난당하고,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 역시 가난한 사람들의 신앙공체에서 일어났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가난한 민중들 속에서 일어났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라오의 밑에서 압제를 당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한국개신교도 가난과 질병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선교를 감당했을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런 한국개신교가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고, 강단을 ‘굿당’, ‘신당’으로 변질시키면서, 목회자들의 입에서 돈의 소리만 외치고, 맘몬만을 노래하게 했다. 한국교회가 교인들이 떠나는 등 경쟁력을 상실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한 것이다.

성령은 기구화된 교회에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지배자의 세계에서 전쟁과 지배자로부터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옮겨지고 있다. 서양의 지배자의 신학, 신민지 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것만이 옳다고 말하는 한국개신교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탄식하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그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비난하는 가톨릭의 경우도, 서양의 지배세력에 합류함에 따라 고난당하는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그리고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을 불러 일으켰다. 무분별한 성령운동과 영성운동으로 질서를 어지럽히는 작금의 한국교회 안에서도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영성과 성령이 특권층 옹호로 변질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에서 종교개혁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임의로 움직이신다. 인간을 억압하고, 자연의 혜택을 독점하고 파괴하는 서양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 이것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부자교회와 부자교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의 의와 그의 나라를 갈망하는 자가 누구인가(?) 그의 나라는 이들의 것이다.

종말적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고난당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세계에 증언되어야 한다. 그리고 매개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는 고난당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감당되어져야 한다.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위치에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십자가에 지고, 돌아가시기 전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며, 절규하시던 예수님의 형상이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셨다. 때문에 지배자의 문화와 수단으로써 복음을 전파해서는 안 된다. 오늘 한국개신교의 선교는 서양의 관념론적 이데올로기로 둔갑해 버렸다. 이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타난 것이 바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신학이며, 신앙이다. 하나님의 영이 고난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에 대해 부자가 된 한국교회는, 이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며,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해 온 교회와 목회자들을 향해 “잘못된 성령운동, 또는 하나님나라 운동이 아닌 사회운동”으로 치부해 버렸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의 성령운동을 부정하고, 가진자들의 ‘충견’으로서 대변해 왔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의 목회자들은 새벽마다 교회당에 나와 눈물을 흘리는 부자들의 눈을 씻어주기에 바빴다. 이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교회당도 이들의 정서에 맞게 꾸몄다. 즉 ‘바벨’과 ‘맘몬’을 노래하는 것이 영성운동이며, 성령운동으로 착각하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라는데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유달상 기자  yds12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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