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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세상을 버리면, 하나님은 교회를 버린다”추락하는 한국교회의 신뢰성을 진단하다(4) … 그 대안은 무엇인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 치유•역동적인 선교의 사명 충실히 감당해야
1인 천하 교회, 분열과 갈등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선교 경쟁력 상실 

지금까지 본지는 3회에 걸쳐 추락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신뢰성에 대해 진단했다. 첫째는 ‘목회자의 위기, 곧 선교와 교회의 위기’, 둘째는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능동적 교회로 전환하라’, 셋째는 ‘2차대전 전범의 ‘피묻은 손’에 기도한 잘못을 회개해야’ 등의 제목으로 연속 연재했다.

3회에 걸친 한국교회의 신뢰성 연재를 하면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로부터 항의도 많이 받았고, 격려도 많이 받았다.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땅 끝으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데도, 목회자와 교인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모른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마디로 하비 콕스가 말했듯이 “교회가 세상을 버리면, 하나님은 교회를 버린다”는 말을 몰각한 결과이다.

교회개혁 필요성 강하게 제기

3회에 걸친 연속기획에서 밝혔듯이 한국교회는 복음의 이탈로 인해 사회적 신뢰는 물론, 교인들의 교회와 목회자를 향한 신뢰도는 땅바닥을 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기에서, 한국교회가 추락한 위상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때이다. 영미의 상업자본주의 식민지신학은 한국교회에 들어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기독교를 부자들을 위한 종교로 변질시켜 버렸다.

이는 결국 목회자들의 입에서 ‘헌금의 액수가 신앙의 척도’, ‘축복’이란 말이 흘러나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변화되지 않고서는 희망을 기대할 수 없다. 사실 한국교회는 목회자들의 윤리적인 타락, 끝없는 맘모니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십자가탑, 중형교회로 번지는 담임목사 세습, 이웃교회와의 반목과 갈등, 교회간의 교인쟁탈전 등등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지를 못했다. 그 결과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 교회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해야 하는 세태를 만들어 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일부 교회들이 교회의 위기위식을 깨닫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치유적 목회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또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행사도 눈에 띠게 늘었다. 또한 한국교회가 한민족의 가장 큰 문제이며, 소원인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것은 치유적인 면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한국개신교는 선교초기 선교사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치유적인 목회에 적극적이었다. 이것은 6.25 한국 전쟁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전쟁고아와 전쟁과부를 돌보고, 그들에게 자생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다. 당시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최고였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었으며, 교회공동체는 매우 건강했다.

그러나 1960-1980년대에 들어 한국교회가 선교사들로부터 재정적 독립이 시작되면서, ‘교회주의’가 목회자들의 생각을 지배하면서, 교회의 치유적 목회는 점점 약화되기 시작해 1990년도에 바닥을 쳤다. 1980년대 일부 교회와 단체가 빈민선교와 사회선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것은 사회운동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역동적인 목회였다.

최근 한국교회 안에서 역동적인 목회에 참여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광복 70주년과 한국선교 130년, 분단 7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한목소리로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한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를 노래했다. 또한 한국교회연합은 다문화가족들을 위한 부모초청 잔치를 열었으며, 한기총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찾아 위로했다. 또한 일부교회는 지역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지원을 전개했다.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는 역동적인 목회와 치유적인 목회를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주후 300년경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이방인들이 교회를 찾아와 보물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이들을 빈민들을 돌보는 곳으로 안내하고,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보물이라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회적 약자 위한 교회로 전환하라

과거 한국교회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역동적인 목회와 치유적인 목회를 충실히 감당했을 당시,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라우렌티우스 집사의 행동은 생동감이 흘러넘친다. 여기에는 평화와 사랑, 그리고 행복이 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변화되고 있는데도, 목회자와 교회의 신뢰도는 회복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추락한 신뢰도를 회복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이 같은 노력의 이면에는 신뢰도 회복의 걸림돌인 또 다른 모습도 있다.

목회자들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터져 나오는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말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로 돌아오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일부목회자들에 의해서 계속된다면, 한국교회의 희망을 기대할 수 없다. 타락한 중세교회와 유럽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제왕적, 아니 파시즘적인 교회에서 탈피 할 수 있는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목회자 1인 천하의 목회는 많은 문제점을 야기했다. 특히 일부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간의 반목과 갈등은 도를 넘어 한국교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교회의 법과 질서는 성직자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며, 모교단의 목회자가 제기한 교회규칙은 담임목사 중심에서 만들어졌다. 이 목사가 교회규칙으로 사회법정의 재판에서, 승리하면서 교회들 마다 교회규칙을 만드는 열풍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같은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교회운영위원회’가 그 대안으로 나왔다. 사실 한국개신교 대부분은 성직자 중심, 남성중심의 구조이다. 한마디로 교회의 교회됨을 위하여 성직자 중심을 평신도 중심으로,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참여의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

마틴 루터는 1530년 ‘독일 개신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성직자 중심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의 공동 참여와 책임성에 기초한 만인사제로”를 제시했다.

교황이라고 하는 전지전능하고, 무오한 존재는 개신교에서 사라졌지만, 한국개신교회는 성직자와 장로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교회를 비롯한 노회도, 총회도 현재의 제도보다는 교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동참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 노회, 지방회, 총회 등에서 일어난 모순에 대해서 주지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다양한 지체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조직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를 비롯한 지방회, 노회, 총회가 전반적으로 민주적이고, 의회적으로 운영될 때 비로소 더 많은 세대들과 여성들이 거기에 참여할 수 있고, 활력을 얻을 수 있다.

교회의 잃어버린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개혁세력(NGO)들과 협조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앞으로 새로운 사회 형성을 위해서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될 세력으로 ‘시민운동’이 부각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단체와 교회의 연대는 매우 절실하다. 지금까지 교회와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많은 것에 대해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괄목할 만한 운동으로는 가부장적 남성문화 지배 시대의 여성운동, 핵무기 경쟁시대의 반핵운동, 내전시대의 평화운동, 산업시대의 환경운동, 남북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사회변혁세력과 공조체제 구축

이러한 시민단체와 연대한 교회의 역동적인운동은 세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여성대통령이 나오고, 국무총리와 장관에 여성이 선출된다. 많은 여성이 지역구와 전국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법조계에도 여성이 많이 진출하고, 1만여명의 여군이 있으며, 이 중에 2명이 장군이다. 기업 중역에 여성이 중용되고, CEO도 여성들이 등장하는 등 각계각층에서 영성들의 활동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만 변하지 않고 있다. 일부교단에서 여성안수를 실시하고 있지만, 여성들의 역할은 아주 미비하다. 교인 70%가 여성임에도 교회 내에서 이들의 역할은 허드레 일이나 도맡아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 교단의 교회는 여성안수를 실시한 이후, 여성교인의 위치가 상당히 변했다.

문제는 여성목사들의 활동이 크게 두드러지면서, 이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도를 넘은 나머지 폄훼하기에 이르렀다. 여성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가 성장하면, 주변의 교회들이 검증되지 않은 문건과 설교를 문제 삼아 ‘이단 사이비’의 올무를 씌우는가 하면, 과거 교리의 올무에 묶어 여성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에 대한 검증되지 소문을 퍼트려 지역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분명한 것은 21세기 성장이 멈춘 한국교회의 마지막 대안은 남성목회자가 지니지 못한 것을 지닌 여성목회자라는 사실이다. 여성목회자에게는 따뜻함과 모성인 사랑, 평화, 생명을 가져다가 줄 수 있다. 최근 여성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들이 크게 성장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한국교회도 변해야 한다. 그래야한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번 생각해 보자 지역사회를 떠난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가(?) 지역사회의 주민 모두는 전도의 자원이며, 선교의 자원이다. 때문에 교회는 지역사회의 문제를 찾아 시민단체들과 함께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방자치가 정착된 상황에서 더욱 그렇다. 그리고 다양한 운동에서 교회는 지도력을 발휘하고, 회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을 찾아,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 실시해야 한다.

이것만이 교회의 잃어버린 신뢰도를 회복할 수 있고, 고갈된 교회의 전도 및 선교자원을 개발할 수 있다. 한마디로 교회는 자본주의적이고, 업적 주의적 미망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룰 수 있다. 그것은 남성지배이데올로기 속에서 희생만을 강요당해온 여성들의 눈물,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다. 그리고 교회성장의 경쟁력을 다시 회복하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이 때 비로소 눌린자의 종교가 아닌 누르는 자의 종교로 변질된 한국교회가 새하늘과 새 땅인 새 시대를 향해 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그리고 고난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이다.

유달상 기자  yds12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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