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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이리떼와 같은 한국교회…자정이 필요하다500년 전 타락한 중세교회보다 더한 현실 통렬한 회개 절실

대한민국이 잔뜩 화가 나 있다. 연일 뉴스에서 보도되는 난폭한 보복 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 만취 상태에서 저지르는 각종 폭력, 직계가족 간 칼부림, 묻지마 살인, 각종 성추행 및 성폭력, 금품갈취 등 살 떨리는 사건사고 소식도 이제 무감각하다. 누구라도 분노의 스위치를 잡아당기면 가해자가 되는 현실이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바야흐로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분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앞서 각종 사건사고들은 사실 욱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장기적인 경기침체에서 오는 불안감과 비윤리적이며 불합리한 세상이 주는 자괴감, 언제어디서든 무서운 살인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청년실업시대, 7포 세대, 극심한 취업난 등 매 분초마다 느껴지는 삶의 고통 속에서 분노조절의 끈이 끊어져버렸기 때문이다. 분노조절장애가 있기에 항상 화가 나있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에 누군가 화약고의 역할을 하면 터져버린다. 이는 곧 각종 범죄의 양상으로 나타나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한국교회도 분노의 시대를 피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작금의 한국교회는 용서와 화해의 모습보다는 분열과 갈등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각종 사건사고의 주범으로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으며, 개교회 안에서도 성도와 성도 간, 혹은 목회자와 성도 간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그만큼 한국교회 자체적으로도 세상적인 것처럼 뜨거운 혈기만 가득한 상태다.

최근 각종 언론을 뜨겁게 달궜던 목회자끼리의 칼부림 사건은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마치 영화 속 조폭들의 난투전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그것도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니 충격이다. 목사가 28cm의 회칼을 숨겨 들어가 상대 목사를 찌르고, 본인도 칼에 찔렸다며 병원신세를 진 모습은 가히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다. 더욱이 이 목사는 앞서 교단 총회 현장에서도 단상에서 가스총을 들었던 전적마저 있어 두 번 놀라게 하고 있다. 다행히 두 목회자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한시름 놨으나, 목사끼리의 칼부림 사건은 희대의 오명으로 남을 전망이다.

이와 함께 앞서서는 현직 목사가 아내를 목 졸라 숨지게 하고, 시신을 토막 내 담벼락 안에 시멘트로 발라 숨기거나 호수에 버리는 엽기적인 범행을 저지른 일도 있었다. 본인이 살인을 하고도 자수하기 이틀 전까지도 태연하게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했던 이 목사의 행동은 주변사람들을 소름 돋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이 목사의 끔찍한 범죄행각은 무분별한 목회자 양성이 어떠한 결과로 오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로, 한국교회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이밖에도 한국교회에서는 크고 작은 분노조절장애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전 대표회장이었던 목회자가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해 현직 사무총장을 향해 폭력을 행사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담임목사가 부목사를 맘에 들지 않는다고 때려 다치게 한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추호의 잘못이나 뉘우침은 없다. 그저 화를 풀었기에 괜찮다는 마음뿐이다.

더불어 담임목사의 비리를 파헤치려는 교인과 덮어주려는 교인끼리의 주먹다짐도 흔한 일이며, 언제부터인가 각 교단 총회 현장은 ‘누가 목소리가 크고, 힘이 강하나’는 식으로 몸싸움과 말싸움이 유행처럼 번졌다. “건드리기만 해봐 가만히 두지 않겠어”라는 마음으로 두 눈을 희번덕거린다. 시한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 직전인 셈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누구보다 용서와 화해를 앞세워야할 한국교회가 되레 용서와 화해를 하려는 그 어떠한 노력도 없이 서로를 향해 날선 공격만 일삼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연합기관마저도 서로 입장조율이 되지 않거나 부득이하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내놓는 카드가 바로 용역 동원이다. 서로 대화로 풀려는 노력보다는 “너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맹렬하게 달려든다. 각 연합기관에서 임원회나 실행위, 임시총회에서 심심치 않게 용역들이 동원되고, 그 가운데 앰블런스와 경찰이 출동하는 일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이는 마치 성난 이리떼와 같은 모습이며, 500년전 중세교회의 타락한 모습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세상적인 욕망이 한국교회의 두 눈을 가리고, 두 귀를 막아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한국교회가 분노조절장애로 인해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접어든 것이다.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한국교회 해법 없나

세상적 욕망 내려놓고, 소통하려는 노력 필요

   
▲ 500년 전 타락한 중세교회보다 더한 현실에 한국교회는 통렬히 회개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데에는 세상적인 욕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맘몬과 바벨을 노래한 나머지 이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과거 한국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려는 모습에만 집중했다. 그렇기에 세상은 한국교회를 향해 희망이라고 칭찬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교회는 세상의 희망이라기보다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만큼 희망을 전해주기 보다, 절망을 안겨줬다. 기대를 한 몸에 받기도 했으나, 이제 한국교회를 향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 모두가 바로 욱하는 마음에서 일어난 각종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 필요 없이 항진되어 있는 분노를 가라앉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장 낮은 자의 자세로 돌아가 섬김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재물과 권력, 욕망의 무게를 내려놓으면 가벼운 마음에서 오직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만 몰입할 수 있다. 그러면 교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고, 세상은 한국교회를 향해 다시 희망을 꿈꿀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재물에 대한 욕심을 떨쳐야 한다. 작금의 한국교회를 좀 먹는 가장 큰 마귀는 바로 재물에 대한 욕망이다. 주의 종이 오히려 교인들의 머릿수를 헤아려 돈으로 계산하고, 예배당을 사고파는 모습은 중세교회의 타락한 전철을 밟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수학적인 계산에서 빨리 벗어날수록 한국교회의 수명은 그만큼 길어진다. 또 재물의 욕심에서 벗어날 때 크고 작은 각종 송사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며, 용역까지 동원해서 ‘치고 박고 해보자’는 부끄러운 일이 한국교회 안에서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불필요하게 예민한 분노를 조절하는 또 다른 방법은 목회자 스스로 여유를 갖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세계교회의 모델이 될 정도로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이뤘다. 모두가 목회자들의 쉼 없는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열과 성을 다해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말처럼 작금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기력과 체력을 모두 소진해 버렸다. 모든 일에 무기력하고, 더 이상 부흥과 성장, 복음 전파에 대한 열망을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다른 곳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육체적 욕망이나 권력, 재물 등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아 탐닉하기에 이른 것이다. ‘번아웃 증후군’은 또 매사에 불평 및 불만을 늘어놓게 만들었고, 자신의 마음대로 일이 처리되지 않았을 시에는 교인이든, 누구든 배척해야할 대상으로 여겨 다툼을 키우게 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현 상태를 돌아보고, 세상적인 것에 열망이 커지지는 않았는지, 혹은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 크게 지쳐있지 않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다면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안식년에 들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니면 단순하게 휴가를 내어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처럼 이러한 휴식을 통해 목회자들은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버려야 한다.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에는 혼자서 하는 것도 좋지만, 상대방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인다면 그 효과는 배가된다. 한쪽이 화가 나서 폭발하기 직전 상대방이 이를 재빠르게 이해해 다독거려 준다면 분을 삭일 수 있는 것과 같다. 한국교회는 사실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오히려 상대방과 단절된 의사소통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대화로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를 복잡하게 법정까지 끌고 가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또 용역을 동원해 대치하는 상황을 만든 것도 마찬가지다. 간단하게 어느 한쪽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취했다면 법정을 가거나 용역을 동원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도 있는데 그러지 못했다. 성도들의 피와 같은 헌금을 아까운 곳에 낭비한 셈이다. 이는 곧 한국교회를 중세 타락한 교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한국교회는 소통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유종환 기자  yjh44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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