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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국가주의에 굴복한 교회, 하나님•민족 앞에 회개를”다시 쓰는 한국교회사(1)-국정교과서 편찬을 놓고 엇갈린 시각

국정교과서 편찬을 둘러싼 찬반논쟁이 뜨겁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단체와 선비적인 목회자들은 일제히 과거의 굴절된 기독교의 역사를 감추기라도 하듯 국정교과서 편찬을 찬성하는 토론회를 비롯한 성명서를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연합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연합이 공동 주최한 국정교과서 토론회는, 일본식민지를 정당화 해주는 결과를 빚어냈다. 일본제국주의의 국가주의에 쉽게 굴복한 한국교회의 이 같은 선택은 당연하다. <기독교한국신문>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오늘, 선교 초기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한국교회가 어떤 모습을 취하고, 당시의 선교정책을 감리교, 장로교를 중심해서 3회에 걸쳐 조명하고, 다시는 기독교의 굴절된 역사가 되풀이 돼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연속 특별기획의 자리를 마련했다.

역사교과서 둘러싼 논쟁 가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찬반논쟁이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안에서도 뜨겁게 달궈졌다. 분명한 것은 우리역사를 몰각하고, 서양의 지배자의 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교회가 민족의 역사 앞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것도 기독교의 역사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일부 단체와 선비적인 목회자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찬성의 목소리를 연일 높이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등의 일부 진보단체와 교단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찬반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연합 등의 보수적인 단체와 선비적인 목회자들은 처음 ‘종교 간의 형평성’을 내세운 역사교과서 편찬을 강력히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이 같은 입장은 온데간데없고, 국정교과서 찬성토론회를 갖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국정교과서 찬성입장을 밝히는 집회를 갖고 있다. 심지어 반기독교적인 언론과 사회에 대해 감시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창립된 한국교회언론회 마저, 정부주도의 국정교과서 편찬을 찬성하는 성명서를 냈다. 이것은 한국교회 언론회의 창립목적에 크게 벗어난 처사라는데 이의가 없다.

보수적인 한국교회와 선비적인 목회자들의 이 같은 행보는 당연하다. 초기선교사들이 일본제국주의에 적극 협력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또한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일제의 ‘피묻은 손’을 위해서 기도한 한국교회의 굴절된 역사를 드러낼 수 없는 상황에서 더욱 그렇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민족을 외면하고, 맘몬과 바벨문화를 좋아하는 한국교회가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 매몰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인 바벨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한마디로 참담하다 못해 슬프다.

조선말 권력을 업고 조선에 들어온 개신교는 선교사들이 주장한 ‘정교분리’에 충실한 나머지,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하고, 가난하고 천박한 민족에게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하지 못했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 극대화 되어서 그대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민족의 독립과 자주성을 포기하고, 기독교를 일본 세력권에 그대로 양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에다 영미선교사들의 ‘정교분리정책’은 일본의 조선식민지 독점권을 그대로 허용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한국교회는 선교 130년이 지난 지금도 인정하지를 않는다. 오히려 교회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천박한 말만 늘어놓는다. 보수적인 한국교회와 선비적인 목회자들이 인정하고 싶어도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역사의 뒤안길을 돌아보는 순간 쌓은 바벨탑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씻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늘 높이 쌓은 바벨탑을 그대로 지키고 싶은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 한국교회의 선비적인 목회자들의 말과 행동이 바로 역사라는 것이다.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선교사들의 ‘복음의 영적진리’라는 미명아래 한국개신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렸다. 특히 우리의 문화와 역사는 선교사들의 영향아래서 기독교인들로부터 ‘터부’시 되었고, 한국교회가 반민족적인 종교로 변질되는 요인을 제공했다. 오늘 한국교회가 민족의 역사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린 것도 이 때문이며, 과거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가 말했듯이 역사를 몰각한 민족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 기독교의 복음이 영국의 선교사에 의해 미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복음과 영국서 바로 뉴질랜드에 직접 들어간 선교사들이 외친 복음과 분명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한국에 들어온 복음은 식민지의 복음이었다면, 뉴질랜드에 들어간 복음은 원주민과 함께 상생하는 복음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식민지 독점권

한국교회의 초기 선교가 얼마나 참담하고, 반민족적이었는가는 영미선교사들의 선교정책과 활동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감리교의 초기 선교사인 존즈와 스크랜톤의 선언은 조선의 백성에게 있어 한마디로 참담하다.

“선교사들은 정치적인 사건을 떠나 한국인민의 도덕적 및 영적인 고향에 전적으로 힘쓰는 것을 행동법칙으로 삼는다”

이것은 분명 영적계몽과 교육운동이란 미명아래 감리교선교의 비역사적이며, 추상적인 책임회피였다. 한마디로 한국인의 정치적인 관여와 의식화를 철저하게 막는 선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봉건주의에서의 탈피와 신교육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존즈와 스크랜톤과 달리 헐버트선교사는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의 죄악과 조선민족의 억울한 심정을 서양에 폭로하려고 했다. 그러나 헐버트의 이 같은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세력 자체가 일본제국주의, 식민주주의의 모체였기 때문이다. 당시 구미 열강들은 침략을 통한 식민지를 넓혀갔다. 헐버트는 선교사들이 주장한 ‘정교분리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조선총독 사이토는 3.1만세운동 직후 총독부에 ‘종교과’를 설치, 한국교회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그리고 일본의 웰치 감독, 스미드, 브로크맨, 아펜젤러 등과 협력해, ‘정교분리정책’에 대한 극대화를 강구했다. 이들 친일선교사들이 ‘조선독립의 불능론’을 공헌하기까지 했다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웰치는 일본제국으로부터 3등급훈장을 받기도 했다.

웰치 감독은 “조선인은 일본지배 아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사이토의 문화정책과 친일파 선교사들의 문화정신이 맞아 떨어졌다. 심지어 박희도 등은 조선의 젊은 청년과 여성들을 대상으로 황국신민으로 일본군에 입대할 것과 정신대로 나갈 것을 연설하기도 했다.

이 같은 영향을 받은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친일역사를 몰각시키는 천박하고, 참담한 토론회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피묻은 손’을 위해서 기도한 한국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일제의 ‘피묻은 손’을 위해 기도

박순경박사는 자신의 저서 <민족통일과 기독교>(1976년, 한길사 펴냄)에서 영미선교사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선교사들은 영미 상업자본주의의 지배자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여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지 못한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영미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정책’에도 불구하고, 깨어난 기독교인들은 민족정신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것은 한민족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언한 것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신민회 사건과 3.1만세운동에서 볼 수 있다. 신민회 사건은 깨어난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이 주도했다면, 3.1만세운동은 기독여성과 부랑자, 농업농민,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전국으로 만세운동이 번져 나갈 수 있는 역량을 발휘했다.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와 정순만 등의 기독교인들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이 조약 무효화 투쟁을 벌였다. 또 을사보호조약에 가담한 매국노들을 암살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분명 이러한 민족운동은 그래도 기독교계의 양심과 민족의 주체의식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언한 것이다.

상동교회를 집회장소로 해서 일어난 신민회는 기독교계의 정치투쟁적 비밀결사단체였다. 여기에 기독교의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이 참여했다. 전덕기 목사는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신민회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전국에서 700여명의 회원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들 중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기독교계의 항일민족운동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작게나마 민족운동의 명맥을 이었다. 이것은 분명 기독교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는데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3.1만세운동에 앞서 선비적인 기독교 인사들은 “독립선언보다는 일본에 독립을 청원하자”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민족주체의식을 상실한 처사이다.

33인의 독립선언문은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나갈 수 있는 기폭제가 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에는 33인은 없었다. 이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본 경찰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연행됐다. 대신 만세의 현장에는 민족을 끌어안고,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는 조선의 청년들을 위해 기도한 민족의 어머니와 농업농민, 부랑자, 학생들이 있었다.

작은 민족운동이 체면 살려주기도

그래도 기독교계의 작은 민족운동은 한국교회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럼에도 매국적이며, 선비적인 기독교계 인사들의 친일행각은 계속됐다. 영미의 상업자본주의 지배자의 신학을 받아들인 이 같은 행동은 당연했다.

감리교를 비롯한 장로교, 구세군, 성결교 등 한국기독교계의 교단들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가주의에 굴복하고,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배교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오늘 한국교회가 참담하고, 가슴 아픈 일을 벌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감리교의 양주삼목사는 신사참배 결의를 “황국신민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니 총회의 결의도 필요없다”며, 결의없이 신사참배에 참여할 것을 통보했다. 감리교지도층에 의해서 제기된 ‘일본적 기독교운동’은 장로교를 비롯한 구세군, 성결교 등이 참여하는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창립됐다. 선교 130년의 역사 속에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하나되었다. 민족의 독립과 자주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일본세력권에 양도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정춘수와 박희도의 행동은 더욱 가관이다.

심지어 영미를 타도하는 교회지도자들까지 나타났다. 그것은 일본이 아시아를 비롯한 미국침략을 정당해 해주는 꼴이 되었으며, 정춘수는 기독교를 불의한 세력들과 합일시켰다. 이런 범죄에 대해서 한국교회가 한번이나 굴절된 기독교의 역사를 조명해 보았느냐(?)는 것이다. 일제하에서 친일적인 행동을 한 한국교회가 반성은커녕, 천박하고, 참담한 토론회를 열었다는데 문제이다. 가장 중립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는 한국교회 언론회마저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참담한 토론회를 지켜보는 국민들이, 한국기독교계의 이같은 행보에 의아해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유달상 기자  yds12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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