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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국가주의와 신정주의 정당화에 앞장다시 쓰는 한국교회사(2)-자유와 삶을 박탈한 민족사적 교육 상실
기독교한국신문 | 승인 2015.11.19 07:46

정치불간섭, 일본침략 정당화로

“현지 선교사들은 선교부와 같이 보조를 취하여 합법적으로 성립된 관권을 존중하고 그들이 하는 일을 필요 없이 방해하지 않도록 각별 주의 할 것이며, 또한 그 나라의 모든 법령을 준수하여 자기들이 일하고 있는 나라의 제자로서 불의가 있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아서 브라운 저 <극동의 지배>)

이 글은 1901년 장로교공의회가 공언한 ‘정치불간섭정책’을 아서 브라운 총무가 1902년 미국 선교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한마디로 장로교 선교부의 정책은 일본 침략세력을 합법화 해 주었다. 그리고 이 정책을 바탕으로 한국교회를 지도했다.

이 보고서가 말해 주듯이 영미선교사들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다. 한마디로 상업자본주의의 지배자신학을 그대로 이식시키는 영미 선교사의 전교전략을 조선에서도 그대로 반영했다. 또한 조선백성의 현실적인 상황을 몰이해 한 보고서이다. 당시 세계적인 흐름은, 선교사들이 말하던 순수복음은 이미 세계 지배세력과 결부되어 있었다. 한국에서의 순수복음선교는 하나의 도피처에 불과했다. 그것은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벌인 불레어의 태도를 보면 분명해 진다.

“우리(선교사)는 한국교회가 일본인을 미워하는 생각을 회개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죄에 대하여 똑똑한 깨달음을 가져야 될 줄 안다. 우리는 국가사정에 상심한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켜서 주님과의 관계에 성의를 두어야 한다고 느낀다”

피압박 조선백성에게 있어 비탄에 빠지게 하는 내용의 글이다. 불레어의 개인주의적 죄 개념은 침략세력의 집단적 죄악을 잃어버렸다. 불레어의 기독교선교는 이미 일본의 침략세력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도 남는다. 교육선교 역시 선교사들의 우리 문화와 역사를 몰이해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서양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했고, 여성운동도 결국 서양화의 방향을 지향하게 됐다. 한마디로 민족의 자유와 삶을 위한 민족사적 교육의 출발점을 상실한 것이다.

이는 조선의 기독교인이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고, 일본제국주의의 국가주의에 쉽게 굴복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대신 조선의 기독교는 일본제국의 권력주변을 맴돌며, 온갖 혜택을 누렸다. 또 1930년 후반부터 일제의 권력에 편입된 한국의 기독교는 영미의 선교사와 교회들을 비판하는 일제의 앵무새 노릇을 했다.

또한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기는커녕, 일본제국의 ‘피묻은 손’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며, 영미 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교파주의에 얽매여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작게나마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와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의 기독여성들은 일본식민지 아래서 민족의 해방과 독립운동을 위해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는 젊은 청년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래서 이들을 ‘민족의 에스더’, ‘민족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지도자와 친일선교사들은 일본제국에 협력하며, 분열을 일삼았다. 해방이후 한국장로교회가 300여개의 교단으로 갈라진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 신정주의와 국가주의 굴복

한국장로교는 1930년대 일제의 신정주의와 국가주의를 정당화해 주고,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온갖 혜택을 누렸다. 이런 사실에 대해 한국장로교단은 선교 130년을 맞은 오늘,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해명해야 한다. 이것만이 한국교회사를 바르게 정립해 나갈 수 있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회개하지 않는 민족은 분명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930년대 한국장로교는 6개의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그것은 일제에 협력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결국 재단법인 설립은 일제의 교회통제에 대한 빌미를 제공했고, 예수님보다 국가를 위에 놓고 선교정책을 펼쳤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신 한국장로교는 분열과 갈등을 일삼았다. 그리고 민족운동을 펼쳤던 목사와 교인들을 징계하는 잘못을 범했다. 대표적인 분열은 찬송가와 공과의 분열이다. 당시 두 개의 찬송가는 교인들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한마디로 찬송가의 분열이 오늘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국장로교가 이미 맘몬에 길들여져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종교교육부는 서북세력을 등에 업고, 단독으로 ‘신편찬송가’를 발행,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정신을 훼손했다. 이는 당시 가난한 교인들에게 큰 손해로 돌아갔으며, 공예배에도 큰 혼란을 야기 시켰다.

1935년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를 탈퇴하고, 종교교육부 주관으로 <신편찬송가>를 발행한 것이다. 이로써 장로교와 감리교가 18년 동안 함께 하나의 찬송가를 사용했던 전통이 깨지는 아픔이 한국기독교 안에서 처음 일어났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찬송가의 분열도, 탐욕에 눈이 어두운 한국장로교 일부지도자들의 분파주의와 교권주의가 만들어냈다. 1983년 <통일찬송가>가 나올 때까지 50년 동안 찬송가의 분열은 계속되었으며, 한국기독교는 2개의 찬송가를 사용해야만 했다.

당시에도 찬송가를 둘러싼 논쟁 및 법적다툼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계속되었다. 한마디로 한국 기독교는 일본제국주의 맞서 싸우기보다, 형제간에 물고 뜯는 광경을 연출했다. 조선예수교서회와 장로교 종교교육부 간에 2년 동안 판권싸움을 벌였고, 조선예수교서회는 ‘신정찬송가’를 덤핑으로 판매하는 일까지 벌였다. 이에 대해 조선예수교장로회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이나, 당시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의 찬송가 판매는 이권이 크게 걸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최고의 교세를 자랑하던 장로교 종교교육부가 발행한 <신편찬송가>는 6만권의 찬송가를 판매한 반면, <신정찬송가>는 2만권 밖에 판매되지를 않았다. 그만큼 장로교의 교세가 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도 탐욕에 물든 교회지도자가 공룡교단을 등에 업고, 찬송가공회를 법인화하여 <21세기찬송가>를 만들어 냈다. 이는 교인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그것은 큰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당시 2개의 찬송가는 교권에 길들여진 장로교 서북파 교권주의자들의 탐욕과 영미의 선교사들이 만들어낸 교파주의의 영향이 컸다. 이것은 결국 장로교와 감리교 등 선교사연합공의회에 속한 선교부 및 단체의 대립관계로 이어졌다. 가난한 교인들이 찬송가를 다시 구입해야 하는 경제적 손실을 컸다.

2개의 찬송가 교인들에게 혼란

<신정찬송가>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 구성한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가 찬송가개정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5년 동안 연구하여 만들어낸 걸작품이었다. 헌데 이것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탐욕에 눈이 멀어 분열을 야기시킨 것이다. 당시 장로교 안에서도 찬송가 분열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서북세력을 빼고는 비서북세력 대부분은 <신편찬송가>의 출판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비서북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로교의 교권을 쥐고 있는 서북파의 주도로 <신편찬송가>의 출판됐다.

이와 관련 <국가주의에 굴복한 1930년대 조선예수교장로회 역사>(그리심출판사)의 저자인 박용권 목사는 “당시 조선의 장로교는 찬송가를 분열시킨 것만 아니라, 장로교내에서 서북파와 비소북파 간에 소모적인 다툼을 벌여, 장로교의 분열의 위기까지 몰고 갔다”면서, “결국 찬송가의 분열은 장로교와 조선예수교서회와의 갈등을 일으켰고, 나중에 장로교는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일본제국주의의 국가주의와 신정주의에 굴복, 스스로 황국신민이 되었다. 2중3중의 찬송가 발행은 일부 인사들의 사업은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영광의 노래는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는 손해와 함께 큰 혼란을 주었다”고 지적했다.

장로교 종교교육부의 <신편찬송가> 단독 발행은 가장 큰 교세를 가진 장로교단의 횡포이며, 폭거였던 것이 분명하다. 더 집약해서 말하면, 당시 장로교 교권을 장악한 평양 중심으로 형성된 서북세력의 오만이었다. 과거 장로교회의 모습도, 오늘 한국장로교의 모습과 별반 다른 것이 없다. 이것은 나중에 장로교단의 분열로 이어졌고, 300여개의 장로교단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찬송가 분열의 중심에 있었던 장로교는. 박용권 목사의 말대로 목사들이 일제의 국가주의와 신정주의에 쉽게 굴복했고, 각 노회마다 재단법인을 설립,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며, 일제의 전쟁놀이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마디로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일제에 맞설 가장 큰 조직을 가졌음에도, 교회와 학교를 일제의 정신개조훈련장으로 변질시키는 잘못을 저질렀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일제의 충견노릇을 한 것이다. 심지어 일부 교권주의자들은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을 일제의 전쟁터의 용병으로 몰아넣기까지 했다.

이들의 범죄행위는 여기에서 끝나지를 않았다. 또한 형제끼리 싸우고, 교회끼리 싸우는 범죄의 소굴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결과적으로 찬송가의 분열은 주일학교 교재의 분열로 이어졌으며, 장로교 단독 기관지를 발행하는 행태도 불러 일으켰다.

1934년과 35년은 조선장로교와 감리교가 조선선교 50주년을 맞는 해였다. 장로교는 감리교와 교섭하여 희년기념식을 성대하게 갖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반목과 갈등으로 얼룩진 양교파는 희년대회를 함께 치룰 상황이 못 되었다. 여기에다 장로교의 서북파와 비서북파의 갈등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 결국 희년기념식은 교권을 손에 넣은 서북세력들의 잔치로 끝나버렸다.

분열의 DNA를 물려받은 장로교

이렇게 분열과 갈등을 조장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작금의 장로교는 곳곳에서 횡포와 갈등을 조장하며, 한국교회 전체를 범죄집단으로 몰아넣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형교단을 등에 업은 일부교회지도자는 교단장협의회까지 분열시키기 위한 책동을 벌이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한국교회연합과 분열의 아픔을 겪게 하는 주동자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욕망의 바벨을 노래하는 교권주의자들의 행보는 더 이상 바라보고, 그냥 넘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같은 과오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보다 높은 곳만을 향해 전진할 뿐이었다. 간단한 예로 타락한 한국개신교는 자신들의 잘못은 ‘나 몰라라’ 하고, 지난 8월 4박5일 동안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향해 타락한 종교의 괴수라며, 비난하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은 교황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교황이 보여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사랑실천에 감동한 것이다. 실제로 교황은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감히 한국 개신교 목회자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보였다.

분명한 것은 국가주의에 굴복한 장로교는 지금이나, 1930년대나 모두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국가권력의 시녀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우스운 것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영미교회와 선교형태를 비난하던 기독교는, 해방이후 영미 상업자본주의의 식민지신학, 지배자의 신학을 극찬하고 나섰다. 이런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줄 여력이 있었겠는가(?) 말이다. 오죽하면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이 교황에게 손을 내밀었겠가(?). 그것은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박용권 목사는 “1930년대 조선의 장로교는 하나님에게 대항한 사탄과 일전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을 포기했다”면서, “조선의 장로교는 자기 우상화를 획책하는 강대한 괴물, 일제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동료와 형제들과 다툼을 벌였다. 한마디로 영적인 싸움을 벌이지 못하고, 혈육의 싸움을 벌였다”고 1930년대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잘못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렇다. 한국장로교는 혈육의 싸움을 벌여 300여개의 교단을 만들어 냈다. 지금도 혈육 간의 싸움, 분열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장로교가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를 않는 오늘 한국교회는,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먼저 회개하고, 기독교의 바른 역사를 정립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국정교과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여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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