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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문화에 길들여진 교회, 고난당하는 이웃의 ‘한의 소리’를 듣자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만이 희망을 이웃에게 줄 수 있다

상업자본주의 길들여진 지배자의 이데올로기 신학서 탈피 절실
전쟁과 기아, 내전으로 고난당하는 민족에게 희망의 길 제시해야

고난당하는 이웃의 목소리 외면 말라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이다. 성서의 전체 흐름을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고 병든 자, 떠돌이들과 함께하며, 이들 속에서 역사하셨다. 하나님은 이들의 ‘한의 소리’를 들으시고,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해방시키셨다. 예수님은 “부자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그런데 오늘 세계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바벨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이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사실 기독교는 콘스탄틴 대제 이후, 기독교가 국가종교가 되었으며, 부자들을 위한 종교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한국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가난한 나라를 식민지로 삼을 때, 기독교를 앞세웠다. 이웃나라를 침략 할 때에도, ‘거룩한 전쟁’이라며, 침략을 정당화 했다. 한마디로 성서에 담긴 교훈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영미의 지배자 신학, 상업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적 신학, 이웃나라를 침탈하는 식민지신학을 정통보수신학으로 삼고 있는 나라 대부분은, 이것이 정통인양 오도하고 있다. 이는 전쟁과 기아, 내전과 종교전쟁으로 고난당하고 있는 세계민족을 더욱 슬프게 만들고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내가 주렸을 때, 내가 목말랐을 때,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내가 벗었을 때, 내가 병들었을 때, 내가 옷에 갇혔을 때라고 말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가난한 자, 눌린 자, 멸시받는 자, 병든 자와 동일화 했다. 이는 또 예수님 자신이 이들처럼 억울한 자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바벨을 노래하는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은 항상 가난한 자, 눌린 자의 하나님이며, 이들을 해방시키는 분이었다.

하나님은 부자도, 가난한 자도 같이 믿고, 누르는 자와 눌린 자가 함께 예배드리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고 서남동 박사는 자신의 저서 <민중신학 탐구>(1983년 한길사 13쪽)에서 “부자가 부로부터, 권력자가 그 권력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고, 만일 그러한 해방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고, 만일 그러한 해방이 있다면, 사회적 정치적 혁명이다”고 했다.

부자들을 위한 종교로 변질된 한국기독교를 향해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눌린 자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가난한 자의 내일 먹을 것을 주시라고, 또 눌린 자에게 불의한 자를 그 눌린 자가 용서할 테니 눌린 자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리라는 기도다.

서 박사는 같은 페이지에서 “항상 먹을 것이 풍부한 부자가 이런 기도를 흉내 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권력자, 누르는 자가 다른 사람을 누르고 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종교의식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다. 부자와 권력자는 주기도문을 드릴 자격이 없게 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이다”고 오늘 부자들의 종교로 변질되고, 권력의 주변을 맴도는 한국교회의 형태를 비난했다. 오늘 왜 기독교인 부자들이 각종범죄에 연루돼 감옥으로 끌려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부자들은 주기도문 드릴 자격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는 결국 십자가를 졌다. 또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에 대한 입장을 누가복음서 14장 15절 이하에서 분명한 입장을 가르쳐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잔치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은 한결 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보아야 하겠소, 미안하오’라고 하였고, 두 번째 사람도 ‘나는 거릿소 다섯쌍을 샀는데 그것을 부려보러 가는 길이요 미안하오’라고 했다. 하인은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노하여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를 데려오라고 했다. 그리고 자리가 남자 울타리의 구경꾼을 데려다가 자리를 채우라고 했다. 그리고 잘 들어라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초대받을 사람이 없다고 했다. 분명 예수님은 부자들을 생명의 나눔인 잔치 상에 초대하지를 않았다.

지식인들을 위한 종교 아니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의 대표적인 인물을 말하면, 선생 및 대학교수, 신문 및 방송기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성서가 말하는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범주에 속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지식인들의 형태를 보면,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해 왔다. 사실 이들은 지배세력의 지배이념을 대변하며, 이들을 편들어 가르치는 역할을 맡아 왔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지식인들은 쉽게 변질되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 떠돌이들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그것은 3.1운동 당시 스스로 민족대표라고 하는 33인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33인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본경찰을 기다렸다가 연행되었다. 대신 만세운동의 현장에는 이 땅의 가난한 기독농민과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 아리랑고개를 넘은 민족의 어머니, 서울로 유학 갔다가 동맹휴업으로 귀향한 학생, 거리를 유리방황하는 떠돌이들이 있었다.

이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1년 동안 많은 기독농민과 기독여성, 그리고 떠돌이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들은 역사의 주체로서, 자기 사회의 주체로서, 자기 운명의 주체로서 하나님나라를 대망했다. 특히 민족의 어머니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집을 떠나는 남편과 아들, 돈을 벌겠다고 하와이와 멕시코로 떠나는 남편과 아들 위해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이것은 ‘민족적인 구원의 표상’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해방이후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지식인들이 지배세력의 지배이념을 대변하고 있는 사이, 민족의 어머니들은 골방에서 무릎을 꿇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리고 이 땅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보다 잘사는 세상을 위해서 땀을 흘리며, 일을 했다. 그래서 이들을 역사의 주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지식인들의 모습에서도 그것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아래서 기독교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목사와 장로들은 총독부에 협력하며, 많은 것을 얻어냈다. 특히 목사와 장로들은 신사참배에 적극 참여하는 등 일본국가주의에 쉽게 굴복하는 배교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기독교의 지식인들은 이 땅의 젊은이들을 향해 일본군과 정신대에 지원할 것을 종용하는 등 일본제국주의에 충성을 다했다.

하나님과 민족의 이름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을 기독교지식인들이 저지른 것이다. 분명 한국교회를 지키고, 기독교의 체면을 살려준 사람은 ‘민족적인 구원’의 표상인 민족의 어머니, 민족의 에스더, 기독농민, 노동자, 떠돌이 등이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나라를 증언한 역사의 주체였다.

지식인들이 본질을 찾고, 본래의 사명을 다했다고 해서 참다운 그리스도인, 아니 참다운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참지식인, 참그리스도인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단당하고 떠돌이들의 형편을 알고, 체험하고 동참하면서 이들의 고난과 기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말을 못할 때 그들을 대변하고, 표현해 주어야 한다. 한마디로 이들의 형편과 갈망을 알고 있는 것이 참지식인이다. 그런데 오늘 기독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면모를 보라! 바벨문화에 편승돼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고 떠돌이들에 대해서 나 몰라라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있기까지 이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민족의 어머니들은 ‘민족적인 구원’의 표상으로 드러냈으며, 산업화 과정에서 살길을 찾아 상경한 농업농민들은 노동자로 산업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교회의 주체로서 하나님나라 선교의 일익을 감당했다. 이제 교회의 주체이며, 역사의 주체인 이들이 교회의 뒷전으로 밀려나 홀대를 받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서에서도 지식인들의 이중적인 형태는 그대로 나타난다. 당시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얽매여 역사의 주체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오히려 민족과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다. 잠언 31장 8-9절에 약자들의 한을 풀어주라는 기록과 신명기법전은 약자들을 보호하는 기록이 있다.

2016년 하나님나라 선교(?)

“너는 할 말 못하는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의 호소를 위해서 입을 열어라. 입을 열어 바른 판결을 내려 고통받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어라”(잠언 31:8-9절)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지 않았느냐?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아라. 너희가 그를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의 호소를 들어주리라…(중략)…만일 너희가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덮을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고 몸 가릴 것이라고는 그 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호소하면 자애로운 나는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바벨문화에 이미 길들여진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메시지이다. 하나님은 분명 약자의 편을 드는 분이시다. 그리고 권력자의 대변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2016년도에 감당해야 할 하나님나라에 대한 선교적 과제이다.

한국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자, 고난당하는 사람, 떠돌이들과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했을 때,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이들을 ‘영의 유괴’를 하지 말아야 한다. 분명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과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자, 고난당하는 자, 떠돌이들과 함께하며, 이들 속에서 역사하셨다.

이런 성서적 전거를 미루어 볼 때,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이지, 부자들의 종교는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하게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자, 고난당하는 자, 떠돌이들의 갈망에 응답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모세도 고난당하는 떠돌이들의 갈망에 응답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면, 한국교회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고난당하는 이웃을 외면할 수 없다. 더 이상 한국교회는 머뭇거려서는 안된다. 초대교회의 신앙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고난당하는 이웃의 한을 풀어주는 위로자로서의 교회, 폭력의 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 교회, 순환운동으로 바뀌어야 하는 교회, 모든 진보사상과 어둠 속 투사와 래디칼의 제단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이 같은 교회의 사명을 상실하고, 죽음의 문제와 영의 문제,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이웃을 어렵게 만드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생활이 나아지면서, 과거 자신들이 갈망했던 하나님나라에 대한 참뜻을 망각하고, 가진 자들의 형태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한마디로 ‘영적 유괴’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유달상 기자  yds12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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