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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목사] 한 사람 ①
기독교한국신문 | 승인 2016.01.27 12:04

   
▲ 황 인 찬 목사
지금처럼 한 사람의 인격이 도매금 취급을 당하는 시대가 과거에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점점 인간을 경시하는 풍조가 이 시대에 만연되는 듯하여 위기의식을 갖게 한다. 어느 조사에서 응답자의 90%가 지금은 위기라고 말했을 정도로 위기의 체감도가 높다.

인간 경시풍조는 인간 존엄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이런 영역에 대해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내놓는 많은 분석들을 쉽게 대할 수 있다.

한 예로 '왜 사람들이 사람을 쉽게 죽일까?'에 대해서 인터넷 상에서 즐기는 온라인 게임의 영향을 지적한다. 인터넷 게임 중에 '리니지'(lineag.-넥슨의 MMORPG 바람의 나라와 함께 언급되는 대한민국 1세대 온라인 게임)라는 게임에 사용되는 'PK'라는 게임기술이 있다. 이것은 'Player Killing'의 약자로, 게임에서 상대측 가상전사를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유(類)의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연히 사람을 물건 취급하듯이 다루게 된다고 한다. 그런 게임을 하고, 보고 자란 아이들 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사람 죽이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고 자랑하기도 한단다.

비록 게임이기는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데 재미를 붙인 세대가 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이런 자녀들과 젊은이들의 영향을 정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성세대까지 물이 들면 이 사회는 자연히 인간성을 상실하여 한 인간과 그 인격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둔감한 세대가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결코 인터넷 게임만이 모든 원인은 아닐 것이다. 도시화 현상의 가속화로 사람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학교나 지하철 등 공공시설에는 분실물 신고 센터가 있다. 분실물 신고 센터의 관계자에 따르면 분실물을 찾아가는 사람이 극소수라고 전한다. 분실물 신고 센터에 보관된 물건 중에는 값이 꽤 나가는 것도 있는데,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사면 될 텐데, 뭘 귀찮게 찾으러 가냐는 것이고, 부모 역시 다시 사주면 되지, 굳이 그것을 찾아오라고 아이들을 채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렇듯 모든 것을 흔히 여기고, 천하게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 이렇듯 물건에 대한 가치관이 결국은 사람을 대하는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한 사람 죽었다. 열 사람 죽었다.'는 소리를 들어도 놀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인간을 경시하고 인격을 무시하는 사고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사람을 보고 대하는 태도에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걱정이다.

한 사람이 지니는 가치는 절대로 양과 수치로 따질 수는 없다. 우리는 '몇 명이냐? 얼마냐? 얼마나 크냐?'는 양(量)에 관심이 많다. 한 사람의 중요성을 잊고 살 때가 많은 것이다.

양이 없는 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양(量)에 마음을 빼앗기면 한 사람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길은 여기에', '빙점' 등등의 유명한 소설을 쓴 일본인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라는 작가가 있다. 미우라 아야꼬는 폐병 환자였다.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각혈을 하며 투병해야만 하는 결핵환자 수용소에 있을 때, 어떤 청년이 찾아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각혈을 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초라하고 가치 없어 보이는 한 여인을 찾아온 청년은 그녀를 붙들고 복음을 전했다. 그 청년은 이 여인에게서 일본 열도와 세계를 후끈하게 데우는 엄청난 작가의 가능성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사랑하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각혈을 하며 죽어가는 한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했을 것이다.

미우라 아야꼬는 수백 명의 전도자보다 더 큰 복음전파의 첨병의 사명을 당당하게 해내어 주께 영광을 돌렸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 사람의 가치는 무한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합적으로 묶어 '세상'이라는 말로 표현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 여기의 이 ‘세상’은 전 인류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세상은 '나'라는 한 사람을 포함하고 있다. '나'(我)는 전체 속에 묻혀 드러나지 않는 것 같고,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크게 보신다. 넓게 보신다. 모든 것을 다 보신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의왕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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