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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신교, 전쟁(지하드)일으킨 급진 이슬람과 연합 활동주의보

기사승인 2019.07.10  21: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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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구르족 이슬람 과격파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고, 이들이 사이비종교이면서 가짜 위장 난민 집단인 전능신교 집단과 연계해 활동하고 있다.

지난 6월 20일, 가짜 난민 집단인 전능신교가 중국 신장 위구르족인 급진 과격 이슬람과 함께 연합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는 곧 사이비종교인 전능신교 집단과 이슬람과의 연합 활동이라 관심을 갖고 주의해 살펴볼 일이다.

중국의 이슬람 역사는 신장의 이슬람 역사에서 출발한다. 본격적으로 신장의 이슬람 역사가 시작된 시기는 960년경 이슬람세계 사만조(875-999)의 한 왕자가 신장의 카슈가르로 망명한 시기였다. 이때 신장 지역 동 카라칸 조의 카칸은 왕자를 지방 관리로 임명하였고, 그의 영향과 설교에 의해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슬람은 초원의 유목민 부족에게 널리 전파되었으며, 신장 카라칸 조의 국교가 되었다. 이때 20만의 유목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중국의 북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신장(Xinjiang)은 1884년 11월 18일 공식적으로 중국(청나라) 영토로 편입되었다. 8개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들(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과 국경선(5,400㎞)을 맞대고 있는 신장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인종 측면에서 중국의 서북쪽 전초기지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장 지역은 위구르 이슬람 문화가 강한 지역이다.

신장의 이슬람은 중앙아시아 동부지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왜냐하면 두 지역은 언어와 문화와 지리적 측면에서 상호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로부터 신장으로 이슬람이 유입된 시기는 10세기이다. 이후 15세기 중엽에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투르크계 주민들의 거의 대부분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으며, 16세기에는 위구르족 대부분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이들의 개종으로 신장 남부 지역의 오아시스 지역은 20세기 말까지 무슬림이 지배적인 지역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준가르(Jungaria) 분지의 카자흐족과 산악 지역의 키르기스족도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대 칸에 대해서는 지하드(성전(聖戰), 이슬람 무장 단체로 탈레반과 알카에다 두 단체의 연계 단체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 단체 이슬람 국가(IS)에 합류하는 사례가 속출하였다)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동시에 선교사들을 파송해 초원의 유목민 부족에게도 이슬람을 포교하였다. 960년 이슬람교는 카라한 조의 국교가 되었다. 이때 20만의 유목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이후 카라한 조는 이드쿠트 왕조와 서하에 대해서도 지하드를 수행하였다.

서요(크탄-크타이)의 통치 시기에는 종교 자유정책 덕택으로 다양한 종교가 자유롭게 전파되었는데 그때부터 이슬람은 이드쿠트 위구르 왕조에 전파되었다. 이후 이슬람은 타림 분지 서부와 남부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14세기 초 이슬람은 천산 남북으로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불교 및 경교와 병존하기 시작했다.

동 차기타이 칸 국의 투르크·티무르 칸(1347-1362)은 무슬림이 된 후 신장 각지에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백성들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였으며, 불교지역에는 지하드를 수행하였다. 16세기에는 하미(코물)지역에까지 이슬람이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일부의 민족들은 전 구성원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13세기에 신장에 진입한 차가타이 몽골은 모두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16세기 이후 위구르족은 모두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청나라 시기에는 위구르족, 타지크족, 회족뿐만 아니라 카자흐족, 키르기스족, 우즈베크족, 타타르족 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하지만 이슬람을 바탕으로 한 단일 사회는 이루지 못했다. 왜냐하면 신장의 이슬람 사회는 지도력과 정치 그리고 종교적 의식과 관행에서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일의 인종 집단도 아니다. 신장의 무슬림들이 단합되지 못하고 서로 의견 통일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는 또 신장으로 유입된 수피(이슬람 신비주의) 종단 간의 경쟁, 부족 간의 경쟁, 그리고 정착민과 유목민 사회 간의 끊임없는 대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타림 분지 오아시스 지역의 투르크어를 구사하는 정착민들은 15세기 중엽에 모두 수니파 무슬림(테러를 자행하며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테러, 공습 기회를 노리고 있는 IS(Islamic State)는 급진 수니파이다.)으로 개종하였다. 이들이 순니(Sunnis)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5세기 동안 이들의 종교적 결속력은 신장 지역 내에서 비록 정치적․사회적 단합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단결력으로 작용하였다.

청나라 이전과 청나라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신장 지역을 실제로 지배한 세력은 무슬림들이었다. 무슬림 통치자들은 수피 종단의 원로(쉐이크, shaykh)이거나 후원자였으며, 모스크를 건설한 사람들이었고, 이슬람의 믿음을 수호한 사람들이었다. 이 기간 동안 청나라의 통치나 청나라를 대신한 무슬림 통치자들에 대항한 많은 소요 사태와 18-19세기에 발생한 침략 행위들은 모두 무슬림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들은 때로 지하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외부 무슬림 침략자들이 이슬람을 믿고 있는 신장 지역을 공격한 것은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타림 분지 오아시스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경제적․정치적 지배와 통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8세기 중엽 청나라는 여러 차례의 군사 공격에서 실패하였지만 결국 준가르와 카슈가르 지역을 중국 제국의 영토로 합병하였다.

그리고 1912년, 이슬람공화국을 탄생시켰다. 1933-1934년 사이에 카슈가르와 코탄(Khotan)을 근거지로 하는 투르크-이슬람 동 투르키스탄공화국이 샤리아에 근거한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신장의 위구르족은 전통적인 순니 이슬람을 추종하였으며, 신장의 전통과 오아시스 유목민 전통을 종교생활에 강하게 반영하였다. 오늘날 대부분 위구르인들은 신장의 도시에 거주하기 보다는 여전히 오아시스 중심의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21세기 신장 지역에서 목격되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의 등장이다. 신장의 반 중국 정서와 저항을 옹호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종교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정부 관련 이슬람 용어와 이슬람의 종교적 불만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신장 지역은 다양한 무슬림 인종 집단(카자흐족, 몽골족, 타지크족, 회족, 위구르족 등), 언어, 지리, 종교 등으로 인해 통일된 집단의 등장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또한 비록 서로 다른 집단들이 서로 힘을 합치려는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신장 지역 전체의 지지나 단합된 의견의 창출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그리고 원나라 때부터 형성되었던 중국인의 무슬림에 대한 반감은 한 번 생성된 후 지속성과 연속성을 가지고 유지하였다.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은 민족적 자존심이 훼손된 사건 직후 대중적 적대감과 반발심을 일반화하여 고착화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중국인들의 무슬림들에 대한 적대감은 원나라 이후 이슬람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중국인은 무슬림을 무정하고 공격적이고 욕심 많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서운 범죄도 행할 수 있는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중국의 새해맞이 기간 동안 중국의 명절을 지키지 않는 무슬림들은 즐겁게 놀기 위해 중국인들을 자신들의 이동주택으로 초대한 후 자지 않고 밤을 보낸다. 무슬림들은 중국인들이 취하면 일어나 텐트를 그들의 몸 위로 허물어뜨린 후 죽을 때까지 마구 때렸다. 그 다음 무슬림들은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마른 우물에 처넣은 후 은을 가지고 도망쳤다. 살인 행위는 다음 봄까지 발각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이 지역에서 발생한 가장 야만적인 범죄들 중 하나였으며,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Israeli, 22)

 위와 같은 배경이 있기에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무슬림에 대한 고정관념과 반감은 대중적 믿음으로까지 자리매김했다. 중국인들에게 회자되는 무슬림관련 이야기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세 명의 무슬림은 하나의 무슬림이다. 두 명의 무슬림은 반절의 무슬림이다. 한 명의 무슬림은 무슬림이 아니다.”(Broomhall, 1910: 244)

“한 명의 무슬림이 여행을 하면 그는 살이 쪄 돌아올 것이다. 반면에 두 명의 무슬림이 여행을 떠나면 날씬해져서 돌아올 것이다.”(Ibid, 245)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무슬림들을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로 간주하였다. 이런 이유로 중국에서는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대중화되었다.

중국 무슬림들에게 전통적으로 붙여진 일반 명칭은 위구르 족을 지칭했던 회회(Hui-hui) 또는 회호(Hu-ho)에서 유래한 회교(Hui-chiao: 회족 종교)였다.

하지만 중국의 무슬림들은 이에 대한 반발로 청진교(Ch'ing Chen Chiao: 깨끗하고 진실한 종교)나 이슬람교(I-ssu-lan-chiao)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문화에 동화되어 그 나라의 관습과 관행을 따르지 않고, 국내법을 어기며, 독자 행동을 하려 한다면 환영받지 못 할 것이다.

더구나 이슬람 교파 중에서도 극단적 과격파가 도사리고 있는 이상,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경계심을 늦추면 안 된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위구르족 이슬람 과격파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고, 이들이 사이비종교이면서 가짜 위장 난민 집단인 전능신교 집단과 연계해 활동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주의해서 살펴볼 일이다.

오명옥 omyk778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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