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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신학’의 신학적 선구자들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논의

기사승인 2021.04.26  13: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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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란의 ‘퀴어성서주석’ 발간에 즈음하여...

* 편집자 주; 지난 4월 20일, 논란의 ‘퀴어성서주석(1. 히브리성서)’ 발간에 즈음하여, 이미 학회지에 발표된 소논문을 다시 싣는다. 혼탁한 시대 조류에 휩쓸림 없이 올바른 세계관과 성 정체성을 갖는데 길라잡이가 되길 희망한다. 각주는 생략함.

 

▲ 이승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오늘날, 동성애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드러나고 비밀리에 동성애 관계에 있던 분들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선언하는 일(coming out)이 자주 나타나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또한 동성애자들을 옹호하는 신학적 논의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 중의 일부는 소위 ‘퀴어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런 ‘퀴어신학’의 선구자들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정통적 기독교에서는 동성애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먼저 동성애 문제는 오늘날에 나타난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지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간들의 타락 이후로 인간들이 행하는 여러 가지 일 가운데 동성애도 계속해서 역사 속에 있어 왔다. 이스라엘이 그들 가운데 살던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서는 동성애의 관습을 포함한 온갖 성적인 무질서가 성행했으며, 가나안 종교의식 가운데서는 남성 성전 창기(male cult prostitute)와의 성적인 관계가 포함되어 있어서 가나안 사회와 그들과 더불어 살던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상당 기간 많은 남성 성전 창기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대 희랍과 로마 사회에서 동성애는 매우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행위였다. 심지어 플라톤의 글에서도 동성애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향연"(Symposium)에서는 동성애가 사람을 성숙시키며 상승시키는 사랑인 “에로스”의 좋은 양태로 제시되고 있을 정도이다. 헬라 문화에서 특히 나이 어린 이와 나이 많은 동성 간의 관계(pederasty, παιδοφθορία)는 특히 젊은이의 교육의 완성을 위해 고귀하고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타락한 인간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있지 않은 적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이다.

이렇게 온 세상에 퍼져 있고, 역사 속에 만연해 있기에 동성애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입장을 강조하는 ‘퀴어신학’의 선구자들의 논의를 살펴보고, 이에 대해서 정통파 기독교는 과연 어떤 입장을 가지는 것인지를 논의해 보기로 하자.

 

1. ‘퀴어신학’의 선구자들의 논의의 예

‘퀴어신학’의 선구자들은 창세기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언급된 구절들을 주석하면서 이 구절은 동성애를 문제 삼는 구절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자신들의 도성(都城)으로 찾아 온 사람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에 대해서 배타적으로 굴며, 그들에게 텃세를 부리고 그들에게 해를 가하려 한 것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원인이 되는 죄악이라고 논의하려고 한다. 이런 논의의 고전적이고도 영향력 있는 예로 우리는 셜윈 베일리(D. Sherwin Bailey)의 "동성애와 서구 기독교 전통"을 들 수 있다. 베일리는 이 책에서 창세기 19:5과 사사기 19:22의 “안다”는 뜻의 동사 “야다”(ידע)가 성적(性的) 함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이 논제를 세우기 위해서 그는 (1) 구약성경에서 “알다”라는 뜻의 “야다”(ידע)라는 동사가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사용된 900여회에 비교해서 성적(性的) 함의를 지니고 사용된 예가 단지 15번뿐이라는 통계와 (2) 성교가 개인적으로 친숙한 앎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육체적 성적 경험 그 자체만이 아니라, 성적인 차이에 대한 의식과 보완 의식이 있어야 만 한다”는 심리적 이유, 그리고 (3) 롯과 사사기 19장의 주인이 모두 그 땅의 우거자들(gērîm)이었는데 “롯이 그 신임성을 점검해 보지도 않은 낯선 두 사람을 자기 집에 들임으로 우거자(gēr)의 권리 이상을 행사한 것이므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이라는 추론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은 이 보다 더한 논의들이 ‘퀴어신학’의 이름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2. 기독교적 사유의 원칙: 계시 의존 사색

정통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성경 계시에 의존해서 사색(啓示依存思索)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경에 근거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에 대해서도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따라서 생각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이 근본적으로 사랑의 행위였고, 사랑의 창조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떠하심을 보여 준 것이 사랑의 근원적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참 사랑은 무원칙적이지 않고, 분명한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선언한다(롬 12:9). 이는 사랑 일반에 대해서 하는 말이지만, 남녀 간의 사랑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모든 면에서 그러하니,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내신 원칙에 따르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애와 혼인, 그리고 성(性) 문제나 모든 친밀한 인간관계와 관련된 사랑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내신 어떤 원리가 있는지를 성경으로부터 찾아보려고 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변화하는 이 세상의 문화에 따라, 또는 세상의 동향에 따라서, 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는 일은 옳지 않은 일이다.

 

2-1. 사랑에 대한 구약 성경의 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원리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실 계획을 가지시고, 먼저 남자를 만드신 후에(창 2:7), 사람의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 자신이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즉,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자)를 지으시리라고 말씀하시고(창 2:18), 남자로 하여금 자신이 혼자이며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심리적 필요를 느끼게 하신 뒤에(창 2:19-20), 여자를 만드셔서 그 둘이 한 몸을 이루고 살게 하셨다(창 2:24). 여기에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혼인의 시작이 있다. 사랑은 모든 면에서의 하나 됨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정서이다. 영적, 정신적, 인격적, 신체적 하나 됨에서 사랑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의 혼인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진정한 하나 됨을 위해서는 사랑이 필수적으로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결국 하나님을 중간 언어로 하는 사랑이다. 두 사람이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이를 더욱 사랑하게 될 때에야 그것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의도하신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대립될 때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은 결국 상대편을 세워주는(up-building) 것이어야 한다. 결국은 상대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다. 또한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잘 세워가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다.

(1) 이런 창조의 원칙에 따라 생각해 볼 때 성경이 이성애와 동성애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나타내고 있는지는 아주 분명해진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대립되지 않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내신 창조의 원리에 따라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 둘이 한 몸이 되어 자녀를 생산하고, 그 결과로 많아져서(繁盛), 땅에 충만하고, 그리하여 온 땅에 흩어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온 세상을 잘 다스릴 것을 원하셨다. 그러므로 창조의 원리에 따르면 이 세상에 창조된 사람은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서 온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하는데, 그런 다스림의 한 부분으로 혼인하여 그의 형상을 닮은 자녀들을 낳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교육하여 함께 온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 일에는 혼인과 혼인 관계, 가정 제도와 가정교육을 포함은 폭 넓은 교육이 함의되어져 있다. 여기 함의된 혼인 관계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 즉 이성애적 관계이고, 그것도 일부일처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와 혼인하도록 하신 것이고, 그런 이성애적 관계를 하나님이 창설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의 빛에서는 동성애의 여지가 있지 않은 것이다.

(2) 그리고 소돔 사람들이 남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천사들과 “상관하리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내어 놓을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그들의 죄악상의 한 단면을 소개하고 있는 창세기 19:5, 7, 9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영어성경 새국제역(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는 아주 명확히 그 의미를 성적인 의미로 규정하여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Bring them out to us so that we can have sex with them." 전통적인 해석은 모두 이런 의미로 보면서 이런 것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심지어 성경 비평적 입장의 해석자들 중에서도 소돔 백성들이 요구한 것은 이 방문자들과 동성애적 관계를 가지려는 것이었다고 해석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이런 것을 볼 때, 이 부분은 동성애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물론 동성애가 소돔과 고모라의 유일한 죄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여러 의미에서 다중적인 죄인이었다. 그러나 동성애도 그들의 죄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위에서 우리는 ‘퀴어신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설윈 베일리의 견해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야다” 동사의 의 사용된 경우들에 대한 통계만으로는 어떤 단어의 의미를 확립하기 어렵기에 어떤 단어의 의미는 항상 그 맥락에서 찾아져야 하는데, 창세기 19장이나 사사기 19장 모두에서 손님을 “알려는” 요구에 대해서 모두 다른 사람을 “아는” 것으로 대치하는 제안이 주어지고 있는데, 그 두 경우 모두 이 제안의 “안다”는 말은 모두 성적(性的)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창 19:8; 삿 19:25). 따라서 소돔 사람들이 요구한 것도 역시 같은 성적(性的)인 관계를 의미했다고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소돔 사람들이 찾아 온 손님들을 더 깊이 알고 그들과 교제하기 원하는데 롯이 그것을 막으면서 그 대신에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을 내어 놓으려고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앎”은 그저 인식적이고 사교적인 앎이 아니라, 성적(性的)인 의미의 앎인 것이다.

둘째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나 기브아 사람들이 참으로 그 손님들을 인격적으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있는데도 역시 “안다”라는 말이 쓰였으므로 이를 그저 인격적으로 친숙히 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또한 문맥상 롯에 대해서 그의 지위를 문제 삼은 것은 그가 손님들을 집에 들여서가 아니라, 그들을 내어주기를 거부하면서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창 19:7)고 하며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 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창 19:8)고 설득하는 것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다음 같은 소돔 사람들의 말은 이런 해석의 타당성을 분명히 해준다: “너는 물러나라.” “이 놈이 들어 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 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창 19:9). 그러므로 창세기 19장의 맥락에서 소돔 거민들이 동성애적 관계를 시사하였다는 것을 배제시킬 수는 없어 보인다.

그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유다서 7절에서는 소돔과 고모라는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동성애적인 죄였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더구나 그와 같이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조차도 소돔과 고모라가 손님 대접에 소홀히 한 것만이 죄라는 명확한 논증을 세우지는 못한다. 동성애적 해석을 통속적인 해석이라고 하면서 이를 애써 피해 보려고 매우 쓰는 Walter Brueggemann 조차도 “성적인 무질서(sexual disorder)가 일반적인 무질서(general disorder)의 한 측면일 수도 있을 것이다.”고 인정한다. 그는 성적인 죄도 “집단 강간”(gang rape)만이 문제될 것임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러나 많은 해석자들은 이와 같이 이 구절을 동성애와 연관시켜 보지 않으려는 주해의 문제를 많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 동성애를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않는 주해를 옳은 주해라고 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논의를 친숙히 알고 그에 대해 반증 논의를 하는 웬함이 결론적으로 분명히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여기서 ‘야다’(ידע)는 성적으로 깊은 관계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고 이는 모든 중요한 주석가들에 의해서 인정되고 있다.”

(3) 그리고 구약적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명백하게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함이니라”(레 18:22)고 강하게 말한다. “가증하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몹시 싫어하시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런 자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고 있다(레 20:13). 그렇게 강하게 공적인 사형(the death penalty)을 명할 정도도 구약의 언약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주 분명한 삶의 원리를 제시해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에는 동성애가 만연하고 있어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그런 행위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사형에 처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실 정도로 이스라엘에게 구별된 삶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 구절들에게 동성애가 아주 분명히 금지되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한 규정이어서 그 누구도 이를 부인할 수 없을 정도이다. 가장 비평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마틴 노트조차도 레위기 18:22도 19-23절에 이르는 “허용될 수 없고 부자연스러운 성적인 관계들”을 언급하는 중에 나오는 것으로 인정한다. 이를 거부하고 동성애가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성경의 권위와 그 가르침을 완전히 저버릴 때에만 가능하다”는 래어드 해리스의 말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4) 더 나아가서 심지어는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신 22:5)고까지 말한다. 이 표현에 대해서는 그것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신명기 22:5에서 “남자의 옷”이라고 번역된 말은 직역하면 “남자의 것들”(man's things)로서 단지 남자의 옷만이 아니라 남성에게 속하는 것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장식물이나 무기나 일반적으로 남자와 연관되는 것들을 걸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후반에 있는 “여자의 옷”에서는 분명히 여자의 옷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체적 의미로는 남자가 여자의 옷을, 그리고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지 말라는 일반적 해석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금한 이유는 (1) 그런 행위가 동성애의 어떤 형태와 연관되기 쉽고, (2) 고대 사회에서는 그렇게 상대편 성의 옷을 입는 행위가 특정한 신들의 제의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두 번째 가능성을 좀 더 의미 있게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럴 경우에는 이 금령의 근본적인 이유는 이교의 예배 풍속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 된다. 그래서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여기서는 그저 옳게 보이는 것(what is seemly)의 준수, 또는 자연에 의해 규정된 것에 대한 순종 이상의 문제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여호와께 가증하다)는 아주 강한 논의가 사용된 이유는 이것이 어떤 제의적 범과(cultic offence)임을 시사해준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가 앞 서 말한 두 가지 이유를 다 제시하는 알렌은 두 번째 이유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종교들에서는 제사장들이 여성의 옷 비슷하게 입거나 아주 여성의 옷을 입고 제의를 집례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것은 대개 그 숭배의 대상이 되는 신이 여성인 경우에 발생했다.”

그러나 이를 증거 할 수 있는 외적인 증거들은 사실 대부분이 상당히 후대인 희랍 로마 시대에 근동에서 행하던 예들인 경우가 많고, 또한 앗시리아의 경우들로 언급되는 예들도 문제가 되는 것이 그저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동성애에 대한 것인지가 논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제의적 이유만을 옷 바꾸어 입지 말라고 한 금령의 이유로 제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또한 어떤 이유에서 이건 이는 “여호와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라고 정죄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금령에는 적어도 창조 때에 주어진 성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주 더 명확히 이 금령은 종교적 이유와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에 의해 수립된 그 ‘성의 구별’이라는 거룩성을 수립하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하는 카일과 델리취는 따라서 “이 구별을 침해하고 제거해버리려는 모든 시도는 부자연스럽고,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라고 말한다. G. E. Wright도 “모든 부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혐오에서 이 금령이 기원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비록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 지를 우리가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더 나아가서 얼 칼란드(Earl S. Kalland)는 이 금령에는 “동성애를 포함한 불법적인 성적 관행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한다.

(5) 그리고 가나안 족속들과 이스라엘 중의 동성애적 행위를(남색, 男色) 비난하면서 말하는 것을 볼 때, 구약 성경이 동성애적 행위와 이를 유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정죄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예를 들어서, 르호보암은 솔로몬이 암몬 여인 ‘나아마’를 취하여 얻은 자녀로 르호보암이 즉위한 후에 이전에 가나안 백성들이 행하던 가증한 일이 유다 땅에 성행하게 되었다. 즉, (1) 우상을 세워 섬기는 일이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이라”) 많았고, (2) 그 땅에 남색하는 자가 있게 된 것이다(왕상 14:21-24). 이 때 “남색하는 자”라는 말은 제의적 창기들(the cult prostitutes)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들 본다. 이는 집합적인 것으로 남성 제의적 창기들과 여성 제의적 창기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풍성한 열매 맺음을 위한 종교적 제의를 행하는 일의 일부분으로 제의적 성행위를 제공하던 자들로 이전 가나안 종교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었다. 이방 종교적인 행위가 정죄된 것이지만 여기서 동성애적 관계도 함께 정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교적 배경과 이교적 함의 없이 남색하는 것은 인정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해석이 될 것이다. 로스너는 세속적 창기(secular prostitute)와 이교 제의적 창기(the cult prostitute)를 구별하고, 전자 즉 세속적 창기는 개인의 도덕적 실패를 지적하는 맥락에서 정죄되었으며, 후자 즉 제의적 창기는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함과 관련해 정죄되었으나, 그 둘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실실함에로 부름 받았음에 반(反)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지적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남색, 즉 동성애도 역시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서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로 유대와 이스라엘 왕 들 가운데 이런 자들을 없애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는 이들로 언급된다. 예를 들어서, 아사에 대해서는 그가 그 아버지 아비얌과는 달리 “그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왕상 15:11) 하면서, (1)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고(12절), (2)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12절), (3) 또 그 모친(실질적으로는 할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다고 묘사한다(13절).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에 대해서도 그가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왕상 22:43)고 하면서, 그의 사역으로 남아 있던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낸 것을 언급하고 있다(46절).

또한 요시아 때에는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에 따라 개혁하는 중에 “여호와의 전 가운데 미동의 집을 헐었다”고 말한다(왕하 23:7). 여기서 “미동의 집”이라고 우리말로 번역된 이곳은(םישדקה תיב), 열왕기상의 번역을 따라 하자면 남색하는 자들의 집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이곳은 성전 안에서 제의적 창기 활동을 위해 확보된 곳으로 이해된다. 요시아 개혁 이전에 이런 미동의 집이 성전 안에 있었다는 것은 당시 종교가 얼마나 가나안 종교와 깊숙이 연관되어 갔는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시대의 대세에 밀려가 심지어 종교까지도 시대의 대세와 합류해 버리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요시아가 율법에 따라 종교 개혁을 하면서 타파시킨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때에는 남색하는 일이 있을 수 없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에는 그 땅에 남색하는 일이 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언약 백성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주변에서 동성애가 성행하는 상황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에 따라가지 말고 그들과는 구별된 삶의 원리를 가지고 살도록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들에게 동성애는 잘 모르는 어떤 이상한 것이 아니고 주변에서 자주 목도 하는 일이었고, 바로 그런 것을 엄격히 피하라고 구약 성경은 언약 백성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2-2. 동성애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

신약에서도 분명히 동성애적 행위는 자연적인 방식을 벗어난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천명한다(롬 1:26). 이 문맥에서 “순리대로 쓸 것”이라는 말은 성(sexual relation)의 자연적 기능(the natural use), 즉 “창조자의 의도에 따른 기능”을 뜻하는 말이다. 이는 자연이나 본성이라는 말에 하나님의 창조적 의도(God's creative intent)와 창조 질서(God's created order)가 함의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쓰며”라는 말은 자연적인 기능을 “자연에 역행하는”(παρὰ φύσιν: that which is against nature) 기능, 즉 “창조자의 의도에 반하는 기능”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창조자의 의도에 따른 자연적인 관계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고, 자연에 역행하는 관계는 여자가 여자와 더불어 관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따라서 곧 이어서 또 다른 자연에 역행하는 관계인 남자와 남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따라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26절과 27절은 동성애적 관계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즉, 동성애적 관계를 부자연스럽고(unnatural) 왜곡된(perversion)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바레트는 이 부분을 아예 다음과 같이 번역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그들 중의 여인들은 자연스러운 성관계(the natural kind of intercourse)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꾸었다.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여성 파트너와의 자연스러운 성관계를 버리고서 서로를 향한 정욕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래서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음탕하고 추잡한 일을 하고,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오류)에 상당하는 벌을 그들 스스로가 받게 되었다.

26절에서 여성 간의 동성애적 관계를 먼저 언급한 것은 후에 남성 간의 동성애의 아주 심각한 문제점을 잘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고 관찰하기도 한다. 이 모든 동성애적 관계는 부끄러운 일이고, 창조주의 의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선언된다(롬 1:25f.). 이로부터 바울이 동성애적 활동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침범(a violation of God's creation order)으로 묘사한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그러므로 이 맥락에서는 “동성애가 잘못된 열정의 대표적인 예(a prime example)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τὴν ἀσχημοσύνην) 행한다”(롬 1:27)고 했을 때, 이는 여자와의 자연스러운 관계(natural relations with women)를 버리고 남성간의 동성애 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맥 전체는 결과적으로 남성 간의 동성애뿐만 아니라. 여성간의 동성애를 포함한 모든 동성애적 관계와 실천을 포함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이 친히 정하셨다고 하는 말(롬 1:32)에는 동성애적 관계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바울은 이 세상의 현저한 악들을 열거하는 중에 동성애적 행위를 포함시켜 언급하고 있다(고전 6:9f.; 딤전 1:9f.). “탐색하는 자”라는 번역된 “말라코스”(μαλακός)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남자답지 않음”(unmanly)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나, 더 구체적으로는 “의식적으로 여성의 스타일이나 방식을 모방하는 젊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것은 쾌락을 위해서든지 돈을 벌기 위해서든지 “수동적인 동성애적 관계”(passive homosexual activity)에로 빠져들어 가기 쉽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문맥에서 “말라코스”는 “남성 동성 관계에서 수동적인편의 파트너”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다.

또한 “남색하는 자”라고 번역된 ‘아르세노코이테스’(ἀρσενοκοἷτης)라는 말은 “남성”(명사로는 ἄρσην, 형용적으로는 ἀρσενικός)과 “함께 자는, 또는 성적인 관계를 맺는”(κοἷτης)이라는 뜻이라는 데에 모든 이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근자에는 바울의 이 용어가 레위기 18:22, 20:13에 나오는 ‘미쉬카브 자쿠르’(mishkav zakur), 즉 “남자와 함께 눕는”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고, 이것은 랍비들의 글에서 동성애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던 말이라는 것을 논증하는 일도 있다.

그렇게 보면 이 두 단어는 모두 남성 동성애자들 중의 수동적 역할을 하는 편과 능동적 역할을 하는 편에 대한 지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런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스크로그즈(Scroggs)도 ‘아르세노코이테스’(ἀρσενοκοἷτης)라는 말 자체는 레위기 18:22과 레 20:13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남성과 함께 눕는 자”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남성과 관계하는 여성 창기를 지칭할 수도 있으므로 모호성의 요소가 있다고 논의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이 동성애적 관계 전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필로 같은 이도 비판적으로 말했던 아동과의 성관계만을 지칭하는 것이고, 바울이 비판적으로 말한 것도 바로 이런 관계에 대해서 뿐이라고 한다. 또한 보스웰은 바울이 동성애적 행위들과 남성 창기와의 관계와 구별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바울은 일반적 동성애적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하고, 동성애적 매춘만을 잘못된 것으로 지적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해는 바울의 글에 대한 자연스러운 주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물론 아동과의 동성애적 관계(Scroggs)나 동성애적 매춘(Boswell)도 문제이지만 그것들만이 문제가 된다면, 바울이 여기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 논의를 길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증거는 보스웰의 결론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바울의 논의는 레위기 18:22과 20:13에 나타나는 구약의 금지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희랍 문화에서 일반적이었던 10대 남성과 성적인 관계를 하는 남성을 포함하여 동성애자 모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잘 논의한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모든 점을 생각하면 가장 자연스러운 이해는 여기서 바울이 온갖 종류의 동성애적 관계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고 해야 한다. 동성애를 포함한 다른 죄들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10)는 말을 매우 심각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도 전반적으로 동성애를 죄악으로 간주하시며, 가증한 것으로 여기셔서 아주 분명하게 비난하시는 것이다.

 

2-3.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결론

그러므로 “구약은 일관성 있게 동성애적 관계를 가정한 것으로 정죄하고 그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었다”고 말하는 해리슨의 주장은 매우 정확하며 정당한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신약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관성 있게 동성애를 옳지 않은 것으로 천명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의하면 동성애만이 죄악인 것은 아니고, ‘정상적인 혼인 관계 밖에서의 모든 성 관계’가 다 죄악된 것으로 정죄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라”(신 23:17)는 말씀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 미동(male cultic prostitute)은 일반적 창기(female prostitute)와 같이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다른 하나님 앞에서의 다른 죄와도 같이 심각하고 무시무시한 죄인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모든 죄를 다 무시무시한 죄로 여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성애만을 정죄하고, 그런 이들이 특별히 더 잘못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동성애의 죄도 다른 모든 성적인 죄와 같이 심각한 죄이고, 하나님에게서 정죄 받을 죄라고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동성애자들도 다른 죄인들과 같은 죄인들이지, 그들이 더 심각한 죄인들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죄는 그 어떤 형태를 진 것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다 심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성애를 비롯해서 모든 잘못된 사랑의 표현이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바른 사랑을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들 중의 하나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고귀한 것들은 타락하면 가장 추악한 것이 된다. 최선의 것이 타락하면 최악의 것이 되는 것이다. 사탄과 뱀을 생각해 보라. 사탄은 하나님이 지으신 천사가 타락한 존재가 아닌가? 또한 뱀은 여호와께서 지으신 들짐승 가운데 가장 똑똑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것이기에 사탄이 가장 잘 이용한 것이다. 또한 인간의 이성을 생각해 보라. 고귀한 기능을 담당하게끔 창조된 이성이 오용될 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게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장 고귀하게 창조해 주신 것일수록 타락하면 더 흉악하게 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능력의 하나인 사랑하는 일도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께서 내신 원리에 따라 행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구약과 신약은 모두 동성애를 모르던 시대에 문화적으로 뒤쳐진 상태여서 동성애를 금한 것이 아니라 주변 세계에서는 동성애가 성행하며, 이스라엘조차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그와 같은 죄악 속에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때가 많은 바로 그런 정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도로 동성애와 다른 모든 죄를 버리고 멀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가 만연하는 우리 시대에도 동일한 성경적 원리가 천명되어야 할 것이다. 동성애가 만연되던 시대에 쓰인 구약과 신약은 동성애를 아주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 오늘 날 성경을 읽는 우리들은 동성애를 인정한다면 그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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